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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림별 Aug 19. 2020

국경을 넘나든 중고 거래를 통해 배운 점

 얼마 전 시댁에서의 일이다. 저녁을 차리려고 식은 가지 튀김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데우기 버튼을 누르는데 기계가 작동을 안 한다. "어머님 이거 왜 이래요?". "응 그거 고장 나서 버튼이 잘 안 눌러 켜지더라고. 이리 나온나 내가 할게" 하시더니 콘센트에서 코드를 뺐다 다시 꼽고는 맨 윗 버튼을 누르신다. 꿈쩍도 안 하던 전자레인지가 갑자기 윙 돌아간다. 사망 선고를 받은 상태나 다름없는 전자레인지에 심폐 소생술을 하는 법이다. 나는 '그냥 하나 사시지'라고 생각하고는 당근 마켓(온라인 중고 거래 어플)에 접속했다. 



 나의 중고 거래 역사는 꽤 길지만 시댁에 필요한 물건까지 '중고'로 사게 될 줄은 몰랐다. '텔레비전', '식품 건조기', '믹서기', '전기 프라이팬' 등은 모두 새것으로 사드렸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중고제품을 알아보게 된 계기가 있었다. 바로 에어컨이다. 여름이 되면 최고 기온 달성으로 입에 오르내리는 그곳,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에서 차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경주가 시댁인데 2년 전까지 에어컨이 없었다. 에어컨 없이도 견딜만하다고 말씀하시던 시아버지가 그 전해 여름, 결국엔 안 되겠는지 오토바이를 타고 경주 하이마트에 가셨다. 에어컨을 구매하실 생각이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종류와 가격으로 인해 결정 장애를 겪으시고는 결국 빈손으로 집에 돌아오셨다. 그리고 나에게 SOS를 요청하셨다. "너네가 구매하면 돈을 보내줄게"라고 이야기하시며. 미션을 부여받고 온라인 쇼핑몰에 에어컨을 쳐보니 수십 가지의 제품이 나왔다. 가격도 40만 원에서 150만 원까지 다양했다. 투인원을 사드리면 좋겠지만 가격이 부담이 되었다. 평수도 크지 않으니 안방에 벽걸이 하나 정도면 되지 싶어 모델 하나를 골라 남편에게 보냈다. "그래도 투인원으로 사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 비싼걸 어떻게 하면 싸게 살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시어머니는 겨울이 되면 싸게 팔지 않겠냐 하셨고 그렇게 에어컨 없이 그해 여름이 지나갔다. 



 그다음 해 8월, 가족과 함께 시댁에 갔다. 장마가 끝난 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시기였는데 한낮 온도는 35도에 육박했다. 밤에도 열대야 갸 지속되었는데 이런 무더위가 처음인 아이들은 온몸을 뒤척이며 짜증을 부렸다. 휴가를 보내러 갔는데 더위에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다음 날 바로 에어컨을 검색했다. 성수기라 가격이 더 올랐고, 주문 폭주로 배송이 지연된다는 안내글이 있었다. 여름이 다 가기 전에 하루 라도 에어컨을 빨리 놓아드려야 하는데 어쩌지 싶었다. 문득 '중고 에어컨'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네이버에 '경주 중고 에어컨' 키워드로 검색을 하여 10군데 가까이 연락을 했다. 그러나 '가정용 투인원 에어컨, 출시된 지 4년 이내'의 조건에 부합하는 제품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 기적처럼 한 곳에서 '설치비 포함 70만 원, 내일 당장 설치 가능'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중고 제품을 사서 놓아드리는 걸 내켜하지 않았던 남편은 업체 사장님께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었다. 설치 후 3개월 내 a/s 가능, 심지어 분해 후 내부 청소도 가능하다는 답변을 얻어낸 후, 시댁에 에어컨을 놓아드렸다. 시부모님은 이제 여름에도 두 발 뻗고 편히 주무실 수 있게 되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중고 거래는 물자 절약 역할을 한다. 나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 누군가에겐 쓸모 있게 쓰이는 '가치 재발견' 은 덤이다. 심지어 나는 국경과 인종을 넘나드는 중고 거래를 하며 문화적 다양성을 배우기까지 했다. 4년 전, 카타르에 체류하면서 쓰던 장롱을 팔았다. Buy it sell it swap it Qatar라는 중고 거래 사이트에 사진과 가격을 올리니 여러 사람에게 연락이 왔다. 그 들중 반은 가격을 말도 안 되게 후려쳤고, 나머지 반은 찔러만 보고는 잠수를 탔다. 그러다 어떤 이에게 연락이 와서 직접 보고 구매해도 되냐고 물었다.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했다. 그날 밤 인도인 가족이 우리 집으로 왔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심지어 할머니까지 와서 내 장롱을 요리조리 뜯어보고는 가지고 갔다. 우리나라에서는 필수 육아 템으로 꼽히는 베이비룸(집안의 위험 요소로부터 아이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울타리)을 팔 때는 필리핀 엄마들로부터 엄청난 러브콜을 받았다. 카타르에는 없는 물건인 데다가 좌식 생활을 하는 아시아 인들에겐 아주 요긴했기 때문이다. 



 중고 물품은 누군가에게 따뜻한 보탬이 되기도 한다. 단지 내 이웃인 크로아티아 친구는 놀이터에서 알고 지낸 필리핀 메이드의 가정사를 듣고 필요 없는 장난감과 옷가지를 모아 메이드에게 주었다.  메이드는 받은 물품을 어린 아들이 있는 필리핀으로 보냈다. 나 또한 카타르 생활을 정리하면서 필요 없는 옷가지와 가방, 신발을 버리지 않고 모았다. 그리고 우리 집에 청소를 하러 왔었던 필리핀 청소부에게 연락을 했다. 혹시 필요하면 가져다주겠노라 하면서. 그녀는 흔쾌히 받겠다고 했고, 귀국하기 며칠 전 그녀를 만나 쇼핑백 3개에 빼곡히 찬 물품들을 건네주었다. "더 좋은걸 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인사와 함께. 그녀는 나를 꼭 안아주고는 조심히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오는 길에 아래와 같은 감사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현재 누리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중고 거래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필리핀 청소부에게 받은 페이스북 메시지

 

인도인 가족이 세심하게 뜯어보고 가져갔던 장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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