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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림별 Aug 21. 2020

악수 퇴사 사건을 견디고 나서

 단군 이래 취업하기 쉬운 때가 언제는 있었겠느냐만, 나 때도 취업하기 참 힘들었다. Ctrl+c와 Ctrl+v 신공을 발휘하며 이력서를 200통 넘게 썼지만, 면접에서 번번이 낙방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눈을 낮췄다.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 등 가리지 않았다. 졸업도 유예하며 전투적으로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러 다녔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마지막으로 ‘여긴 붙겠지’라고 생각한 곳마저 떨어졌다. 총 직원수가 10명도 안 되는 무역회사였다. 허탈함에 자존감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라는 상품에 심각한 하자가 있나 싶었다. ‘인상이 문제인가?’, ‘스피치 학원이라도 다녀야 하나?’ 온갖 생각이 들었다. 그때 한 회사의 인사팀에서 전화가 왔다. 구직사이트에 올린 이력서를 보고 마음에 드니 면접에 보러 오겠냐고 하면서.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고민이 되었다. 회사 규모도 작고, 정보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합격을 해도 고민을 할 것 같았다. ‘괜히 시간 낭비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과 ‘그래도 면접장에 발 디뎌 보는 경험이 어디야’라는 생각이 팽팽히 맞섰다. 면접일 전날까지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면접을 보러 갔다. 첫 번째 이유는 합격 소식을 들어 땅속으로 꺼진 자존감을 만회하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내가 모르는 알짜배기 회사일 수도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합격해도 안 가면 그만이니 손해 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목적지에 다다랐다. 수화기 넘어 들었던 그 회사의 이름이 적힌 건물이 떡 하니 보였다. 외관은 다소 촌스러웠지만, 수도권의 노른자 땅 위에 사옥이 있는 회사라니 나도 모르게 기대가 되었다. 면접장에 들어가 마르고 닳도록 외운 자기소개서부터 입사 후 포부까지 완벽하게 읊고 나왔다. 그리고 며칠 뒤 합격 통보를 받았다. 예상대로 기쁘기보다 고민이 되었다. 회사 이미지도 연봉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포기하지 못했다. 바로 직무 때문이다. 이 일은 내가 그렇게 하고 싶던 ‘해외 영업’ 업무였다. 사실 평범한 영문과 출신에게 대기업 ‘해외 영업’ 업무는 언감생심이었다. 뽑는 인원은 많지 않은데 반해 해외파와 명문대 출신 영어 능통 자도 앞다퉈 지원하는 곳이 바로 이 분야이기 때문이다. 수십 번의 시도 끝에 그들만의 리그에 틈이라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입사일, 결국 나는 회사로 갔다. 


 첫 출근 때 나보다 5살은 더 되어 보이는 전임자로부터 A4용지를 빼곡히 채운 인수인계서를 받았다. 동료에게 툭툭 던지는 말투에서 1년이 채 안 되는 회사 생활 동안 이곳에 질렸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녀는 나에게 심지어 “XX 씨가 출근 안 할까 봐 두려웠어요."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내가 오지 않으면 후임자를 물색하는 동안 회사를 더 다녀야 하는 것이 그렇게도 싫었던 것이다) 인수인계가 끝나자 그녀는 도망치듯 퇴사했다. 


 회사 생활은 모든 면에서 적응이 안 되었다. 업무 절차와 용어를 이해하느라 온종일 머리에 불이 났다.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은 선배를 ‘언니’라고 부르는 사내 문화도 이해가 안 되었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바로 업무 방식이었다. 외국에 있는 바이어에게 보내는 모든 메일은 사장의 '최종 확인'을 거쳐야만 발송이 가능했다. 사장은 선생님 마냥 영업팀 직원의 메일 초고에 감 놔라 배 놔라 간섭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의도에 맞지 않으면 몇 번이든 다시 작성해서 자신에게 올리게 했다. 다혈질에 욱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던 여사장은 퇴고도 기분에 따라 그때그때 달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더욱 충격이었는데, 이 회사는 가족 회사였다. 회장과 사장이 부녀 관계였고, 사장과 전무는 부부 사이였다. 인터넷에 우스갯소리로 가족 같은 회사는 (가) 족 같은 회사라는 말이 떠돌았는데 그 말이 꼭 들어맞았다. 


 무소 불위의 사장은 직원도 제 맘대로 대했다. 마음에 안 드는 직원이 있으면 수시로 사장 방으로 불러들여서 큰소리로 야단을 치고 못살게 굴었다. 헌신짝처럼 너덜너덜 해진 직원은 곧 자진 퇴사했다. 우리 팀에는 일을 못하고 속도 없는 남자 직원이 하나 있었는데 사장이 아무리 하대하고 못살게 굴어도 꿋꿋이 버텼다. 결국 사장은 그 남자 직원을 예고도 없이 해고했다. 퇴근길 악수를 청하면서. 이 사건은 후에 동료들 사이에서 ‘악수 퇴사’로 회자되었다. 입사 한지 1년도 안되어 자의 반 타의 반 회사를 그만둔 사람이 절반 가까이 되었다. 상식 밖의 일이 즐비한 이 회사에서 나는 빨리 일을 배워 ‘경력직으로 이직’ 하고 싶었다. 속으로는 이를 알면서도 맡은 바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사장한테 욕을 먹고 몸에 사리가 쌓이면서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갈아 넣었다. 그 결과 입사 2년 차 만에 대리로 진급을 하였고, 연봉도 조금 더 올랐다. 인정을 받을수록 동시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강해졌다. 어차피 그만둘 거 이왕이면 '박수받을 때' 떠나는 게 더 나을 테니. 입사 3년 차에 본격적으로 면접을 보러 다녔다. 더 좋은 회사에 합격해서 사장 면전에 사표를 날리며 보란 듯이 퇴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이직을 하지 못한 채, 퇴사와 해고 사이에서 애매하게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첫째를 임신을 하며 첫 회사 생활이 마지막 회사 생활이 되었다.


 대학 내내 치열하게 준비한 취업 5종 세트 (인턴쉽, 아르바이트, 자격증, 공모전, 봉사활동)가 이 같은 직장생활을 위한 것이었나 생각하면 마음이 허탈해질 때가 있다. 드라마에서 본 직장 생활의 로망을 실천하지 못한 탓이다. (나도 사원증을 목에 걸고 다니고 싶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삶은 내가 원하는 위치보다 항상 15도쯤 비켜진 자리에 위치했다. 그때마다 가만히 있으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 같아 조금씩 전진했다. 목적지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멀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전공을 살려 임신한 동안 영어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고, 해외 영업 업무를 경험을 토대로 카타르 체류하는 동안 마주한 애로사항에 대해 이메일과 전화로 해결해 나갔다. 귀국 후 지금까지는 두 가지 경험을 적절히 활용하여 '온라인 영어 그림책 스터디'를 운영 중이다. 코로나로 두 아이와 집콕하면서도! 마지막으로 밋밋할 수 있는 내 글에 참신한 소재가 되어 주니 이만하면 활용가치를 다 하지 않았을까? 내 앞의 주어진 현실이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뒤바뀔지 모르니 오늘 하루 묵묵히 살아나가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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