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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챠챠 May 13. 2024

날씨가 내 안에 들어왔다.

3차

내게 주어진 땅을 무엇으로 채워볼까.


밭에 꽈리고추 모종 2개와 방울토마토 모종 1개를 심고 당근 씨앗을 뿌려놓고 온 뒤, 내 삶에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날씨'가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작년 날씨가 기억이 나질 않는데 올해 너무 이른 더위가 찾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땅 속 온도는 70도 가까이 될 거라는데 뿌리가 약한 식물들이 잘 버텨주려나.  

뜨거운 날에 식물에게 물을 주면 오히려 식물이 타버린다고 했다. 텃밭이 가까우면 종종 들러서 물이라도 줄텐데 그러질 못하니 기온이 높아지면 바싹 마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비를 기다렸다. 비가 내리면 반가웠다. 비를 기다리는 농부를 아주 조금, 공감하게 되었다. 메마른 날이 이어지던 날 엄마가 모르는 이가 심어 놓은 농작물을 걱정하는 마음도 알 것 같다. 나는 습기를 머금은 날씨는 물론 우산 쓰고 고인 물을 피해 걷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축축한 기운은 곧 찝찝함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 며칠 비가 오면 모종이 떠올랐다. 덜 미안해진다. 심어놓기만 하고 가보질 못 했으니 내심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남은 빈 자리에는 내 취향을 담아서 가꾸어야지.

갈아놓은 땅에 무엇을 심을까 고민했다. 적환무를 심고 싶었는데, 근처에는 씨앗을 팔지 않았다. 20일 만에 크는 무라니 끌렸던 것이다. 샐러드로 먹기 좋은 무인데 자줏빛이 도는 달걀처럼 생긴 무였다. 온라인 구매를 하자니 씨앗값과 배송비가 같다. 망설여진다.

텃밭이니까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 가꾸자.

비닐 멀칭도 안 하는데 택배로 씨앗을 사는 마음에 걸리기도 해서 텃밭 근처 로컬푸드직매장 앞에서 파는 모종을 서 밭을 가꾸기로 마음먹었다.

아이가 하는 '동물의 숲'게임을 실제로 하는 기분이다.  텅 빈 내 방에 가구를 채워가는 것 같기도 하고.




모종을 사본 적이 없어서 구경하는 것만 해도 신기했다. 올해 수확물을 볼 수 있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으니 물어보고 사야 한다.

고민하다가 청양고추 1개, 파프리카(노랑, 빨강) 1개씩, 딸기 4개, 오이 4개를 샀다.

가지는 열매 맺을 땐 예쁜데, 내가 먹질 않아서 안 사고, 수박은 살까 하다가 말았다.

작은 수박 품종을 사고 싶었는데 혹시나 안 자랄까 봐.


하나씩 채워지는 중


저번에 속초에 놀러 갔다가 딸기농장에서 딸기 체험을 했던 일이 생각났다. 딸기향이 가득한 비닐하우스에 들어가서 딸기를 땄었다.  

모종 판매 아저씨가 마음에 드는 딸기 모종을 고르라고 했다. 벌써 초록색 딸기 열매가 조그맣게 달려 있었다. 그래서 딸기는 4개.

파프리카는 좋아하는 채소니까 색깔별로 한 개씩.

고추를 즐겨 먹진 않지만 가끔 청양고추 한 개 썰어 넣고 칼칼한 찌개를 먹고 싶으니까. 아니면 마요네즈와 잘게 썬 고추, 간장을 섞어서 반건조 오징어를 찍어 먹으면 맛있으니까 딱 한 개만 심었다.

오이 모종은 4개. 썰어서 초고추장 찍어 먹으면 맛있는 오이. 딸이 생오이를 좋아하니까 4개를 심었다.


내가 밭을 가꾸는 이유는 건강한 먹거리 생산. 먹거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점점 씨앗이 자랄 땅이 좁아지고 있다. 좀 더 나이를 먹으면 무엇인가 더 심고 싶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가서 배우려면 늦으니 미리 배워두는 것이다. 내 땅이 생기면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라도 텃밭을 가꿀 수 있으니까 노후 준비라고 해두자.


지난번에 배운 데로 모종이 들어갈 땅을 파고 물을 뿌리고 땅에 스며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한번 물을 뿌린 뒤 모종을 심었다. 흙이 물을 머금으며 색이 진해지고 축축한 냄새가 훅 끼친다. 흙을 팔 때마다 보이는 작은 곤충, 지렁이, 달팽이가 모종을 함께 키워줄 거라고 믿는다.

자꾸 땅을 파는 두더지, 얘는 텃밭에 이롭지 않을 것 같지만.

두더지 생김새가 궁금하긴 하다.


조용히 모종만 심고 가려고 했는데 호스 사용법을 몰라 어쩔 수 없이 관장님을 호출해야 했다. 관장님이 작년에 심고 남은 열무 씨앗을 주셔서 한쪽에 길게 심었다. 그리고 집에 있는 빈 화분에도 심었다.



관장님 점을 먹고 가라며 한상을 차려주셨다.

강된장, 두부, 두릅, 각종 나물, 김치, 멸치, 물김치 등 한상 가득이었다. 요즘 나물 반찬을 좋아한다. 식당에서 나물이 나오면 싹싹 먹는다. 예전에는 향 때문에 싫었는데 이제는 나물 향이 좋아졌다. 봄이라 먹을 수 있는 나물.

특히 강된장에 머위나물 조합은 최고였다. 강된장만 있었어도 충분한 밥상이었다.

별거 아니라는 듯 내어주신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오니 내 밥상이 참 초라하게 느껴진다. 몸에게 미안하다. 그래서 마트에 갔을 때 두부를 두 모 샀다. 두부를 두 모나 산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텃밭을 가꾸는 것도 처음이고 밭을 바라보며 나물 가득한 밥상을 먹어본 것도 처음이다. 나물 맛을 제대로 느껴본 것도.


관장님 밭에 가득한 돌나물.

너무 많아서 버릴 지경이라기에 두 주먹정도 받아왔다. 씻어서 초장 찍어 먹으면 맛있는 돌나물.

나물 캐기 좋아하는 엄마가 냉이 캐면서 돌나물이 보이면 뜯어 와서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에게 이야기해 줘야지.

테이블에 앉아있는데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나물 밥상으로 배를 채우고 과일에이드와 꽈배기를 먹었다.

입 안은 계속 강된장과 쌉싸름한 머위나물이 맴돈다. 며칠 쨍쨍한 뒤에 다시 시원하게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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