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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챠챠 Apr 24. 2024

내게 주어진 한평

2차



땅을 보러 갔다.

씨앗농부학교 첫 시간 이후에 수업 신청을 해서 두 번째 수업 전에 따로 와서 땅을 정리해야 한다기에 따로 약속을 잡고 가게 되었다. 반바지에 얇은 긴 팔을 입고 갔는데도 더웠다. 선크림은 발랐지만 모자는 챙겨가지 않은 나를 본 씨앗도서관 관장님이 본인 모자를 하나 더 가지고 와서 쓰라고 주셨다.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않아서 호미와 목장갑도 빌렸다. 한낮의 밭은 무척 뜨거웠다. 

문득 시골길을 걸었던 날이 생각났다. 시골 동네에 취재하러 가면, 사람 사는 동네가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해서 의아했던 기억이 났다. 아침에 아이 학교를 보내고 준비해서 나오면 9시 반쯤이었고, 시골 동네까지 가는데 1시간 걸리니 도착해서 둘러보다가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때는 낮이었다. 한여름이었나.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을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올 때마다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다들 어디 가셨지?"

"주변에 밭은 많은데, 다들 다른 일을 하시나 봐."

같이 길을 걸었던 사람과 대충 이런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걷기도 힘든 한낮에 왜 밖에서 밭일을 하는 사람이 없는지 궁금한 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오늘 밭에서 일을 하면서 알았다. 한낮에는 더워서 밭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벽에 나와 일을 하고 들어간다는 거다. 그리고 햇볕이 뜨거울 때 식물에게 물을 주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도.

밭이랑, 밭고랑을 눈으로 보기만 했지 내가 직접 만들어야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다행인 건, 첫 시간에 참여했던 어떤 남자분이 본인이 쓸 밭에 퇴비를 주면서 빈 밭 두 칸에 함께 뿌려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밭에 남은 자리 중 어디를 할까, 고르려다가 누군가가 퇴비를 뿌려서 정리해 놓은 밭, 가장 끝자리를 선택했다. 어쩐지 잡초도 몇 개 없었다. 잡초를 뽑을 땐 뿌리까지 뽑아서 흙 밖으로 내놓아야 한다. 잡초가 말라죽으면 다시 땅으로 돌아가 다른 식물이 자라는 것을 돕겠지.

내 밭 옆에 채소를 심어 놓은 분이 채소 주변에 잡초를 빙 둘러놓았다. 우리는 밭에 환경을 해치는 비닐을 씌우지 않을 거라, 비닐 대신 잡초를 널어놓은 거란다. 잡초를 널어놓으면 햇볕을 못 받으니 잡초가 자라지 않고 내가 심은 채소만 잘 자라게 된다. 우리 먹거리를 키울 땅에 비닐이 썩어 들어가는 건 끔찍한 일이다. 건강한 땅에서 키운 채소를 먹기 위하여, 땅을 비닐로 덮지 않기로 했다. 

몇 개 남지 않은 잡초를 제거하고 나니 다음에 모종을 심을 수 있게 밭이랑, 밭고랑을 만들어야 한다. 삽으로 흙을 파 올려 두둑이 쌓아 이랑을 만들고, 삽질한 곳은 고랑이 된다. 흙을 쌓아 올린 곳은 호미로 흙을 잘게 부수어 숨 쉴 구멍을 만들어 물이 잘 스며들 수 있게 해야 하며, 고랑은 깊게 파지 않아도 되나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자리를 만들었다. 



왼쪽 그림자 진 곳이 내게 주어진 밭이다. 바로 옆 자리는 나처럼 첫 시간에 오지 못했던 분의 자리다. 우리는 삽을 들고 밭이랑을 만들었다. 흙을 파다가 돌멩이가 나오면 다른 곳으로 치워주고, 흙이 잘 파지지 않으면 발로 삽을 밟아서 흙 속에 밀어 넣는다.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웃으며 봤던 삽질이 정말 쉬운 게 아니구나. 역시 겪어봐야 아는 법이다. 고작 한평 남짓 밭이랑을 만들었는데 목이 탄다. 혼자 있을 때 빠지는 잡생각 따위는 삽질 몇 번에 저만치 사라져 버렸다.

"이제 물 좀 마시며 쉴까요?"

"네."

모종은 각자 준비해 가지고 와서 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 뭔가 할 거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 밭을 보니 취향대로 무언가 심어 놓았다. 밭이랑도 촘촘하게 여러 줄로 만든 사람이 있었고, 채소를 빽뺵하게 심어 놓은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 밭 크기 기준으로 보면 한 줄에 모종 4개가 적당하다고 했다. 땅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빽빽하게 심으면 다 같이 잘 자랄 수가 없다. 제일 어려운 '적당히' 기술이 필요하다. 그런데 똑같이 주어진 땅에서 수확량을 늘리고 싶은 욕심이 생거나 다양한 종류를 심어보고 싶은 경우 간격이 좁아지고 만다.

그리고 내가 심을 모종이 커서 얼마큼 자라는지, 어떻게 뻗어나갈 지에 따라 심는 위치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옥수수는 키가 커지니 다른 식물의 햇볕을 차단하지 않도록 한쪽 끝에 일렬로 심어야 하고, 호박은 덩굴을 타고 자라니 울타리에 가까운 곳에 심어야 한다. 그리고 구덩이를 파서 퇴비를 넣고 섞은 뒤 호박 모종을 심어야 잘 자란다. 퇴비를 많이 먹는 모종이라서 심을 위치가 무척 중요하다. 


사람이 모종을 여러 개 들고 왔다.

옥수수, 꽈리고추, 방울토마토, 당근 씨앗 등을 가지고 와서 모종과 씨앗을 심는 방법을 배웠다.

흙을 손가락 한마디 정도로 길게 파서 씨앗을 뿌리고 살살 흙을 덮으면 씨앗 심기는 끝이다. 막 심은 씨앗 자리에는 물을 주지 않는 거라고 들었다. 

모종을 심을 때는 구덩이를 파고 물을 흠뻑 적셔준 뒤에 심는다. 흙을 다시 메꾸고 모종 주변을 살짝 둥글게 파준다. 비가 오면 둥글게 파 놓은 자리에 물이 더 많이 스며서 모종에 전달되는 원리다. 마침 모종을 심고 난 다음 날 오전에 비가 내렸다.



모종을 가지고 온 언니가 꽈리고추 모종 2개, 방울토마토 모종 1개, 당근 씨앗을 조금 나눠주었다. 

첫 줄에 꽈리고추, 두 번째 줄에 방울토마토를 심었다. 그리고 제일 뒤에 있는 넓은 이랑에 세로로 한 줄을 파서 당근을 심어야겠다. 팠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살짝 흙을 걷어내고  당근 씨앗을 쪼르르 뿌렸다. 처음 당근 씨앗은 아주 가벼워서 바람 불면 표표히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뭣도 모르고 목장갑을 끼고 만졌더니 장갑에 달라붙어 털어내기가 번거로웠다. 그리고 씨앗 위로 흙을 뿌려주듯 덮었다. 물은 주지 않았다. 

흙을 팔 때마다 기다란 지렁이가 꿈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도시에서 비가 오면 아스팔트로 기어 나왔다가 해가 바짝 뜨면 말라죽는 모습만 보다가 흙 속에서 모습을 보인 지렁이가 되려 낯설다. 


밥상에 나물이 있으면 손이 잘 가지 않았는데, 요즘은 반찬으로 나물 무침이 나오는 식당을 찾아서 간다. 데쳐서 양념을 조물조물 무치면 금방 만드는 게 나물 반찬이라는데 얼큰한 국보다 맑은 국 맛 내기가 어렵듯이 나물도 어렵다. 다 같은 초록색 잎인데 씹으면 쌉쌀한 맛이 나기도 하고 봄향기 나기도 한다. 신조어로 얼쓰한(earth) 맛, 땅맛?이라고 했나. 아무튼 그런 말도 있단다. 땅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건강한 토양이 지켜져야 하는데 땅이건 바다건 이미 쓰레기에 치여서 몸살이 나버렸다. 씨앗농부학교에서 친환경 퇴비를 사용하고 비닐을 사용하지 않고 텃밭을 가꾸는 건, 건강한 밥상을 지키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밭 옆으로 좁은 길을 따라가면 관장님 집이 나온다. 관장님은 우리가 모종을 심는 동안 점심밥을 해주셨다. 특별히 한 거라곤 갓 지은 냄비밥과 강된장뿐이라는데 식탁 위에 올라온 건 흙에서 자란 건강한 봄나물 한상이었다. 

강된장에는 두부, 표고버섯등이 잘게 잘라져서 버무려졌는데 간이 세지 않아 자꾸 먹게 되는 맛이었다. 강된장은 머윗잎쌈과, 데친 두부는 볶은 김치와, 두릅은 초고추장과 어울렸다. 곁들여 먹는 빨간 물김치와 이름 모를 나물 무침, 몇 년 되었다는 매실장아찌, 멸치볶음, 보랏빛 밥까지 하나하나 고유한 맛이 느껴졌다. 사진에 나오지 않은 밥은 각종 잡곡을 넣었는데 촉촉하고 차졌다. 늘 흰쌀밥만 먹다가 제대로 된 밥을 먹은 것 같아서 밥 먹는 시간이 행복했다. 식탁에 올라온 나물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맛을 오롯이 느끼며 사람들이 봄이면 나물을 사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텃밭을 바라보며 먹는 점심식사여서 더 그랬을 것이다. 집에 와서 내가 차린 저녁을 먹는데 자꾸 점심에 먹었던 맛이 생각난다. 텔레비전 앞에서 통조림 캔 몇 개로 밥을 때우듯이 먹다가 내 몸에 신경 쓴 한 끼를 먹었더니 한결 몸이 건강해진 기분이 느껴졌다. 한 끼에 몸속이 달라지는 건 거의 없겠지만, 땅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고 텃밭이 좋아졌다. 벌써 수확을 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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