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3일에 텃밭에 다녀온 뒤, 내내 발길을 끊고 지내다가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갔다.
슬슬 꾀가 나던 참이었다. 밭을 잘 가꾸어서 정돈된 한 평을 꾸리겠다는 꿈은 이미 끝난 듯 하다. 땅은 너무 많은 생명을 지켜내고 있었다. 내 꿈을 비웃는 잡초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게다가 집에서 밭까지 가려면 1시간은 족히 걸리니 잠깐 시간 내서 갈만한 거리가 아니다. 밭이 있는 동네가 어디인지 모르고 시작한 것도 아니면서 고작 찾은 핑곗거리는 집과 밭의 거리. 아마 밭 관리가 끝나는 날까지 내 게으름은 거리 탓이라고 둘러댈 좋은 핑곗거리다.
아무튼 나는 첫 줄에 청양고추와 꽈리고추를, 둘째 줄에 파프리카와 토마토를, 셋째 줄에 딸기를, 넷째 줄에 오이를, 마지막 줄에 당근씨앗을 뿌려놓고, 왼쪽 끝에 길게 열무 씨앗을 뿌려놓고서는 방치한 것이다.
다행히 열무는 잘 자라서 텃밭 옆에 사는 관장님이 수확하여 열무김치를 만들었다. 딸기 모종과 당근 씨앗에는 지지대를 세워놓지 않았는데, 오늘 가서 상태를 보니 심각했다.밭을 본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무엇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내 밭은 작은 숲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작 한 달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체감상 한 달이 짧은 것 같지만 땅에게는 긴 시간이라는 걸, 바뀌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는 걸.
지지대에 묶여있지 않은 딸기와 당근은 잡초 사이에 숨어 대체 어디 있는지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내 옆 밭을 가꾸는 분도 전혀 와보지 않았는지 두 밭이 모두 숲을 이루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을 잘 만들어 놓았는데 걸을 자리가 사라졌다.
5월 13일
6월 10일
지지대는 내게 등대였다. 게으른 도시농부에게 지지대가 없었다면 모두가 잡초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식물이 자랄 만큼 예측해서 높은 지지대를 세웠는데 이렇게 빨리 도움을 받을 줄이야... 식물에게는 기댈 곳이 되어 주었고 내게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설마 이만큼 자라겠어? 라고 생각했었는데.
"제 밭은 제가 심은 식물과 잡초가 구분이 안 돼요."
내 밭 옆옆자리에서 수확 중인 분께 말을 건넸다. 그분 밭은 잡초 없이 깔끔해 보였다. 지난달의 내 밭처럼.
"저는 심어놨던 콩을 잡초인 줄 알고 뿌리째 뽑았어요."
정말 나 같은 사람은 식물마다 지지대를 해주던지 고리라도 달아 잡초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표시해 둘 필요가 명확해졌다.
지지대를 따라 내가 심은 작물을 겨우 확인했다. 지난번에 빨간 노끈으로 대충 묶어두었는데 누군가 손을 댔는지 빨간 끈은 사라지고 마끈이 보였다. 토마토 곁순도 따줘야 한다고 들었지만 길이 막혀 다가갈 수 없었다. 멀리 보니 초록색 방울토마토가 맺혀있었다.
발 디디기가 무서운 텃밭이지만 그래도 해보자는 마음을 들게 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오이'
오이 모종 4개를 심어놓았는데 그새 노란 꽃이 떨어지고(꽃이 폈는 줄도 몰랐다) 기다란 오이가 달려 있었다. 한 두 개가 아니라 대략 8개 정도는 수확했다. 정글 같은 밭에 큼직한 오이가 주렁주렁 달려있다니! 오늘 참여한 사람들 모두 놀란 표정이었다.
그런데 오이는 물을 많이 먹지 못하면 쓰단다. 오이 한 개만 잘라서 맛보기로 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오이 끝을 먹자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런데 말이지, 맛있는 거다.
시중에 파는 크기 정도의 오이, 먹던 맛을 냈다. 사람들이 동요했다.
"지금 오이 모종을 사서 심어도 되나요?"
"오이 모종은 봄에 한 차례 심고, 다음엔 가을에 심어요. 오이 모종이 거의 안 나올 거예요."
한 달 사이 비가 많이 왔던가, 아니면 누군가가 물을 줬을까.
내 오이와 꽈리고추다. 청양고추는 아직 새끼손톱만 했다. 정글 같은 밭에서 튼실하게 자라줘서 더욱 감격스러운 첫 수확이었다. 수확물을 보니 미안해진다. 다시 걷기 좋은 내 밭을 만들어야 하는데, 언제 하러 가지.
오늘 수업 주제는 토종 콩과 팥이다.
개량종은 맛과 색깔이 특화되어 있어 보기 좋고 맛도 달콤하지만 씨앗을 받으면 점점 약해진단다.
토종팥은 농부들이 선별해서 대대로 내려오는 맛이고, 예쁜 씨앗을 골라 명맥을 이어왔다. 여러 가지를 심고 입맛대로 심으며 씨앗이 이어져 왔을 테니까. 우리 땅에 어울리는, 어릴 때 먹어본 그 맛은 '토종씨앗'을 지켰을 때만 이어질 수 있다.
먼저 콩, 팥을 심을 땅을 개간했다.
참여자들이 줄줄이 서서 잡초를 뽑아 내 오른편에 정리를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쌓인 잡초는 곧 길의 역할이다. 그래서 공간을 넉넉하게 두었다.
내 몸에서 땀냄새가 훅 끼쳤다. 실내에서 강의하면 얼굴에 땀범벅이 되고, 산책만 해도 땀이 뚝뚝 떨어진다. 강의할 때 긴장했나, 아니면 날이 심하게 더운가 싶다가도 늘 하던 강의에 실내인데 좀 이상했다. 화장품을 바르면 그대로 흘러내릴 만큼 땀이 쏟아진다. 그런데 밖에서 잡초를 뽑고 있으니 얼마나 땀이 많이 나던지 얼굴이 흠뻑 젖었다. 몇 시간 일한 것처럼 땀구멍이 확 열려 버렸다. 콩팥을 심을 자리가 정리되고, 각자 종류가 다른 토종 씨앗을 받았다.
예쁜 씨앗만 골라내는 작업을 했다. 강사님께서 무척 중요한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예쁜 토종씨앗을 골라서 심으면 잘 자라서 또 많은 씨앗을 맺겠지. 우리는 토종씨앗을 지키려고 땀을 흘려 씨앗을 심을 자리를 마련했다.
붉은팥이라도 크기가 다르다. 대팥, 흰 팥 등을 소개했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건 개골팥. 팥 색깔이 얼룩덜룩하다. 씨앗을 심을 때는 땅을 살짝 파서 2알씩 넣고 그 위를 살짝 덮어준다. 6월은 팥을 심을 때란다.
씨앗 심기는 봄에 마친다고 생각했는데, 땅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심는 시기가 있었다.
다음에 밭에 가면 새싹을 볼 수 있으려나.
귀향초+하늘초
청양고추처럼 매운 귀향초.
하늘을 보고 있길래 신기해서 물어봐야지, 싶었는데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나 보다. 생고추를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맵다니 사람들 먹는 것만 구경하고 몇 개 집어 왔다. 마요네즈와 섞어서 소스처럼 먹으면 괜찮겠지.'
지난번에 이야기 듣기론 연해주에서 봉화에 시집오며 귀향초 씨앗을 가지고 와서 '귀향초'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들었다. 토종씨앗 이야기를 써보고 싶은데...
크고 윤기 나며 색이 좋은 고추이고, 맵지만 단맛이 느껴지는 품종이란다. 지금 풋고추를 따먹어야 나중에 맺는 고추가 뒷심을 받아 잘 큰다니 다음을 위해 몇 개씩 따줘야겠다.
밭작물이 저마다 열매를 맺었다. 이제는 물 주기보다 퇴비를 만들고 잡초멀칭에 집중해야 할 때다. 열매가 맺은 작물에 물을 많이 주면 열매가 물러지고 터지거나 곰팡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바로 다음 일정을 가려다가 서둘러 집에 왔다.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만 같았다. 시간이 있었으면 잡초를 뽑고 왔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참 찝찝했다.
스멀스멀 올라오던 땀냄새를 나도 이해 못 하겠는데 다른 사람에게 안겨줄 순 없으니 집에 오자마자 부랴부랴 씻었다. 그전에 차가운 물을 몇 컵 들이켰다. 평소에 마시지 않던 물을 한 번에 몰아 마신 것 같다. 물을 무척 좋아한다던 오이가 생각나네. 씁쓸한 오이를 샀다가 버렸던 일이 문득 떠오르면서 농사는 자연과 함께 짓는 거라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