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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챠챠 Jul 10. 2024

비의 기로

수확하는 날



7월 초, 비가 쏟아지거나 습도가 높아 바깥 활동을 하기가 꺼려진다. 여름이 오면 작년에도 날씨가 이랬었는지를 생각해 보지만 딱히 어느 시기에 특히 더웠던 건지 생각나진 않는다. 여름은 그 자체로 더우니까. 난 그저 세차게 비가 쏟아지는 날에 우산을 쓰고 바깥을 걷는다거나 일부러 나가는 일은 거의 없다. 프리랜서 생활하면서 여름에 일하는 건 피하자고, 바깥에 나가야 하는 건 봄에 빠르게 하거나 가을로 미룰 수 있으면 미루기로 결심하지만 뜻대로 되는 건 없다. 

올초에 대만에 갔을 때 더위를 걱정하며 여름옷 위주로 챙겨갔는데, 춥고 비가 왔다. 날씨에 된통 당했다. 특히 지옥펀이라고도 불리는 지우펀에서는 비에 질릴 지경이었다. 대만에서 꼭 해야 한다는 예쓰 진지, 예스폭지 등 버스투어가 있는데, 예류, 스펀, 진과스, 지우펀을 다녀오는 코스다. 보통 예류, 스펀, 지우펀은 꼭 포함되어 있다.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우비를 사서 입고, 입장하는 곳으로 모이세요."

예류에 도착했을 때 가이드가 안내 방송을 했다. 대만 우비는 질이 좋으니 꼭 사라는 것이었다. 지금 필요 없을 것 같아도 투어 다니면서 비가 오니까 우산보다는 우비가 낫다는 말도 덧붙였다. 버스 창밖을 보니 비가 살짝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비를 사서 입는 것부터 설명하는 건 상술 같기도 하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가 멈추자 우비를 잔뜩 든 아주머니들이 몰려왔다. 우비는 한국돈 5천 원가량, 대만 돈으로 100NT. 아주머니 손에 든 우비를 빠르게 스캔하고 색깔을 고른 뒤 돈을 내는 간단한 방법이라 지폐 한 장과 우비를 맞교환하듯이 빠른 손놀림으로 순식간에 우비가 동났다. 우비 아주머니들은 주차장 쪽에 무리 지어 자리 잡고 있다. 아마 버스 한 대에 한 명씩 맡는 것 같다. 버스 한 대에 탄 사람이 거의 다 우비를 사니까 정말 순식간에 팔린다. 

미심쩍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비를 사서 투명 포장 비닐을 뜯자마자 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기대도 안 했지만 가격대비 질이 좋은 우비였다. 우비에 지퍼가 달려있고, 색깔도 예쁘고 매끄러운 질감도 마음에 들었다. 싸 보이지 않은 파스텔톤부터 원색 계열의 우비 등 색깔별로 다양해서 뭘 골라야 할지 망설여질 테지만 그 사이에 원하는 색깔이 사라져 버리니 지체할 시간이 없다. 

툭 건드렸다가 찢어져 버리는 비닐처럼 얇은 우비와는 달랐다. 우리나라에서 파는 싼 우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더니 정말이었다. 게다가 우비는 비를 피하는 용도 이외에도 쓸모가 있었다. 내가 갔을 대만은 우리나라보다 추웠다. 관광보다 쇼핑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비가 바람을 막아주기도 했고 일회용이라기엔 지퍼가 달려 있고 질이 좋았다. 비가 안 와도 우비를 입고 있어야 했다.

대만은 자주 비가 오는 탓에 우산도 튼튼해서 쇼핑 리스트에 올라가 있다. 비를 좋아하지 않아서 우산을 살 생각이 없었는데 우연히 우산 매장에 들어갔다가 우산도 샀다. 우산살이 유연해서 뒤집어져도 문제가 없다며 점원의 친절한 설명을 듣다가 어느새 나는 우산을 고르고 있었다. 자동, 반자동, 수동을 선택하고 2단을 살지 3단을 살지, 장우산을 살지 고른다. UV차단이 되는지도 중요하다. 우산은 비를 피하는 데 쓰지만 양우산은 햇볕과 비를 막아 준다. 여름은 피할 게 많다. 비를 피하거나 태양을 피하거나. 

우산을 고르면서 생각했다. 살면서 우산 매장에 가본 적이 있던가. 시장에서 우산 파는 있지만 우산 브랜드 전문 매장이라니. 맘카페에 장화를 사야 할지 고민하는 글이 올라오는 걸 보면 우리나라도 장마보다는 우기가 어울리는 여름이 된 것 같다. 


밭에 가는 날, 비 예보가 있었다. 여름 들어 자주 사용한 우산, 창고에 넣어뒀던 우비를 꺼냈다. 여벌옷, 모자, 비닐봉지를 챙겨 텃밭에 갔다. 날씨가 걸리긴 했지만 당분간 비가 내릴 것이고 수확을 하긴 해야 하니까 이왕이면 텃밭 수업에 참여하는 게 낫다. 다음 달엔 수업이 없고.

텃밭 수업에 오는 한 농부가 말했다.

초보 텃밭 농사꾼이 제일 포기를 많이 하는 시기가 지금이라고. 비를 맞고 잡초가 쑥쑥 자라서 자주 돌보지 않은 텃밭 주인은 손을 놓아버린다는 거다. 그나마 수확할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재미로 오긴 하나 그것도 잠깐이지 포기가 빠르단다. 아무래도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긴 하다. 

내 밭에 잡초를 싹 뽑고 간 지 2주 좀 넘은 것 같은데 다시 잡초가 빼곡해서 당황스러웠다.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아도 잘 자란다. 그러니 잡초일 테지.

비가 오면 땅이 뭉쳐있어서 잡초를 뽑기보단 옆으로 눕도록 밟아준다. 꾹 밟아도 길이 가 긴 잡초는 다시 일어선다. 잡초를 헤치고 수확물을 찾았다.

비를 피할 겸 씨앗도서관 관장님 집에서 묵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소감을 나눴다. 

"저는 텃밭을 정원이라고 생각했어요. 예쁘게 잘 가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정글이 되어버렸어요.  텃밭을 가꾸려면 사람이 다니는 공간 확보가 중요하다고, 그래야만 일할 맛이 난다고 했는데 정글밭을 보니 순간 그 말이 생각났어요. 제가 다니기 편하게 닦아 놓은 길을 잡초가 차지하고 나니 무엇을 해볼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잡초를 뽑으려고 해도 뭐가 잡초인지 구분이 잘 안 되어서 망설여지기도 했고요."

수확이 끝나면 가을 작물을 심는다고 했다.

"또 심는다고요?"

종류별로 골고루 심으며 수확을 꿈꿨던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손이 안 가는 작물 하나만 심어야겠다는 마음이 먼저 든다. 쌈채소를 심지 않은 건 참 잘했다. 


유일하게 씨로 키운 당근



점점 비가 더 퍼붓는다. 앞으로 일주일 이상 더 비가 오리라는 예보를 봤다. 잡초는 비를 맞고 얼마나 더 잘 자랄지. 비가 그칠 때까지는 자진해서 텃밭에 갈 생각이 없는데...

더위에 이어 비가 텃밭에 가는 내 발걸음을 막는다. 가을볕에는 발걸음이 좀 가벼워져서 가을 작물에 설렘을 느끼려나 섣부른 생각을 하다가 곧 그럴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날이 좋으면 좋아서 다른 일이 생겨버릴 테니까. 특별한 이유가 아니라 핑계가 내 발걸음을 잡아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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