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개발자들에게 프로그래머가
반년 전 즈음 저는 지인과 짧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주제는 ‘개발자는 왜 개발자인가’ 하는 스님의 선문답과도 같은 대화였습니다. 개발자였던 저는 대화를 나누며 선뜻 그 이유를 명확하게 답변하지 못했습니다. 평소 개발자임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녔던 저에게 직업명의 유래를 설명하지 못했던 것은 생각보다 큰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개발자라는 단어에는 너무나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개발자라고 하면 소프트웨어 개발자. 즉 프로그래머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시대의 변화 때문입니다. 본래 개발자라는 단어는 부동산 개발자들을 뜻했습니다. 지금도 영문으로 ‘Developer’를 검색하면 제일 처음 부동산 개발자라는 뜻이 나옵니다. 하지만 무언가 없었던 것을 생각해서 만들어내는 직업이라는 주된 의미가 부동산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옮겨오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개발자는 그 뜻을 바꾸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직군인 프로그래머가 그 직업명의 지분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죠. (제 글에서는 쭉 프로그래머로 표기합니다.)
하지만 개발자는 프로그래머라는 단어와 동의어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비스를 만들어나가는 것을 개발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도구로 하나의 것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기획서로 개발하는 기획자, 디자인 시안으로 개발하는 디자이너, 그리고 프로그램으로 개발하는 프로그래머로서 말이죠. 우리나라에서 나누어진 이 3가지 큰 직군이 만들어나가는 것은 결국 하나의 서비스입니다.
최근 들어 그 직군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스타트업에서는 기획자라는 직군이 없습니다. 그 자리를 프로그래머와 디자이너가 각각 자신에게 가까운 쪽의 일을 모두 흡수하여 일합니다. 그리고 최근 기획자는 SQL, Python, R 같은 기존의 프로그래머 영역의 것들을 배우기 시작했고, 디자이너는 프로토타이핑 툴로 거의 UI 코딩과 비슷한 난의도의 툴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프로그래머는 기획서나 디자인 시안 없이 바로 프로그램을 만들어가며 지속적으로 개선해가기도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이제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일과 실제 프로그램 사이의 거리가 그만큼 좁혀진 것을 뜻합니다. 일의 속도를 떨어트리는 중간단계의 산출물. 서로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든 것들은 이제 점점 필요 없어지고 프로그램이라는 최종 결과물만 남은 셈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도구를 사용해 개발했던 직군들이 점점 프로그램을 알아가는 형태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안된다고만 말하는 프로그래머와 싸우는 기획자. 어디까지가 기획서에 어디까지가 디자인 시안에 나와야 하는지를 놓고 벌어지는 기획자와 디자이너의 다툼들. 옆으로 1픽셀만 옮겨달라며 아웅다웅하는 프로그래머와 디자이너. 이렇듯 서비스 개발이라는 공통의 과제가 시작되면서부터 발생한 전통적인 문제를 시작으로, 이제는 점점 좁아지는 직군들 사이의 간격이 더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매주 금요일 연재될 <개발자 사용설명서>는 프로그래머가 쓰지만, 결국 프로그래머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의 서비스를 모두가 나눠 개발하는 모든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서로 간의 이해를 위해 연재될 겁니다. 그리고 더 넓게는, 막연하게라도 개발자와 스타트업. 그리고 의미 있는 무언갈 만들어 내는 것에 관심이 있는 분들과 나누고 싶은 주제들이 많습니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저는 결국 프로그래머입니다. 그 직군으로 살아온 저에겐 수많은 선입견이 존재하고, 이 글은 당연히 프로그래머 중심적인 글이 될 겁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그 생각의 틀을 깨고, 같은 개발자로서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자 이 글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다음 주부터는 제 직업인 프로그래머를 시작으로 제가 직접 경험한 프로그래머의 커리어와 삶을 몇 편의 글로 짧게 요약해보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제 자신을 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10년 차 프로그래머이자 유튜브 <즁 필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미 유튜브에는 제 커리어에 대한 이야기 15편이 올라가 있습니다. 앞으로 연재될 글은 그 영상들을 조금 더 깊게, 보다 넓게 다루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럼 <개발자 사용설명서> 지금부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