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사람들로 채워진 유럽여행

part.2

by 재연

영국에서의 3일이 지나고, 체코 프라하로 이동하는 4일 차까지도 몸은 여전히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유럽에 취해 고통에 무뎌졌는지, 그 몸으로 하루에 3만보씩 걸어 다니곤 했다. 처음 간 프라하는 작고 낭만적인 도시였다. 캐리어 가방을 끌고 다니는 여행족들에겐 울퉁불퉁한 돌로 된 도로가 좀 성가시긴 했지만, 까를교에서 보는 노을은 프라하를 올 충분한 이유였다. 늦은 밤에 도착한 프라하에서의 첫날이 지나고, 둘째 날 눈을 떴을 때 목에 싸한 느낌이 왔다. 침을 삼킬 때마다 칼끝으로 목 안을 긁는 느낌, 긁는 걸 넘어 할퀴는 느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2018년에 내가 그랬으면.. 혹시 내가 코로나 첫 감염자 아닐까?' 해열제를 먹어도 내리지 않는 열에 살면서 처음 느끼는 날카로운 인후통까지. 이제 막 나아질까 말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아파버린다고? 외국에서 병원을 가서 약을 처방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약국에서 인후통에 좋다는 목캔디 같은 사탕을 사서 의식적으로 하루에 몇 통씩 까서 입에 털어 넣었다. 필사적으로 빨아서 사탕즙을 목 뒤로 넘겼지만 도무지 통증은 나아지질 않았다.



아름다운 프라하를 실컷 구경하고 잘 놀았던 것과 별개로 도시를 옮기고 하루하루가 지나도 내 상태는 나아지질 않았다. 인후통은 더 심해져서 5분에 한 번씩 물을 안 들이켜면 목 안이 사막처럼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하루 종일 물 먹는 하마였다. 목을 감싸 안고 우리의 세 번째 행선지인 크로아티아 자그레브로 이동했다. 늦은 저녁 경비행기처럼 작은 비행기를 타고 도착했을 땐 이미 주위에 불 켜진 곳이 없는 깜깜한 밤이었다. 비행기를 타느라 물을 끼고 있지 않았던 나는 간과한 것이 있었다. 여기는 유럽. 유럽에서도 크로아티아. 한국에서는 한 블록에 하나씩 있는 24시간 편의점이 여기 있을 리가 없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혹시나 하는 희망으로 깜깜한 밤거리를 배회했지만 그나마 열려있는 곳은 술집밖에 없었다. 빳빳한 사포로 목을 긁어대는 것 같아 없는 물을 찾아다니는 우리는 오아시스를 찾아 떠난 사막 탐험대 같았다. 조금 덜 무서워 보이는 술집 하나로 향했지만, 휴무일에 주인아저씨와 친구들이 야외에서 맥주 한잔씩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영업하냐고 물어봤다가 쓸쓸히 뒤돌아서서 조금 더 돌아다녔지만 방법이 없었고, 설마 죽기야 하겠냐며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있었던 그 술집 사장님은, 웬 동양인 여자애 세명이 밤늦게 돌아다니다가 털레털레 소득 없이 돌아가는 걸 보고 호기심과 측은지심이 생겼는지 말을 걸었다. "문 열어줄까?" 우리가 술을 마시고 싶지만 영업시간대를 놓쳐버린 여행객 같았나 보다. 착한 주인아저씨의 호의에 슬쩍 물 따로 파시냐고 여쭤봤고, 창백한 내 얼굴에서 낌새를 차리셨는지 물론이라며 한 병씩 나눠주셨다. 이 시간엔 마트도 다 닫는다며 공짜로 가져가라고 하셨다. 생전 처음 가보는 나라에서 첫마디를 나눈 외국인 아저씨에게 누구보다 한국적인 따스운 정을 느꼈다. 극구 돈을 지불하겠다 했지만 손사래를 치며 그냥 가져가라 하셨던 대머리 외국인 아저씨. 덕분에 그 날밤 나는 넉넉한 물로 자기 전까지 목을 촉촉하게 적셨고, 그 다음날 눈을 떴을 때 나를 몇 날 며칠 괴롭히던 인후통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눈을 뜨고 침을 삼키는데 목에 기름칠한 것처럼 침이 도로록- 옥구슬 굴러가듯이 넘어갔다. "애들아 나 목 나았어!" 아플 걸 미리 감지하고 찡그리고 있던 안면이 스르륵 풀렸다. 두 번 삼켜도, 세 번 삼켜도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언제 아팠냐는 듯 그렇게 자그레브에서의 둘째 날 나는 말짱해졌다. 한국에서 가져와 착실히 먹은 약들과 프라하에서 연신 빨아댄 목캔디, 그리고 세 나라를 거치며 마신 온갖 종류의 물들로 나은 걸 수도 있지만, 대머리 아저씨의 따스운 물 적선이 아주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하련다.



팔팔해진 몸을 이끌고 마지막 도시, 두브로브니크로 이동했다. 두브로브니크는 해안가에 있는 도시라서 그런지, 크로아티아의 휴양지 같은 곳이라서 그런지, 뚜벅이 여행객들에겐 쉽지 않은 곳이었다. 유일한 대중교통인 버스는 배차간격이 기본 30분에서 1시간이었고, 그마저도 우리나라처럼 언제 오는지 정확하지 않아 일단 정류장에서 대기를 하고 있는 방법밖에 없었다. 장을 보고 캐리어와 함께 겨우 탄 버스에서 내렸지만, 구글 지도에 찍힌 우리 숙소의 위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에어비앤비 메시지를 주인 분에게 급하게 보내봤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우리가 단단히 잘못 찾아왔거나, 사기당했거나, 둘 중 하나다. 같은 길을 계속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가로질러갔다가 건너갔다가, 해는 점점 떨어지는데 어떡하지. 동분서주하는 우리 셋을 쭉 지켜보고 계셨던 큰 길가에 있는 빵집 아저씨가 나오셔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셨다. 우리는 구글 지도를 보여주며, 이 주소가 우리 숙소인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고 울상을 지었다. 빵집 냄새만큼이나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는 빵집 옆에 있는 트럭을 몰고 오시더니 타라고 손짓했다. 조수석에 한 명, 나머지는 두 명은 빵이 가득한 트렁크 칸에 올라타서 빵들과 함께 들썩들썩 흔들거리며 언덕 위를 올라갔다. 도착한 숙소 앞에서 빵집 아저씨는 마중 나와 계시던 주인 분과 이웃주민 사이인지, 인사하고 좋은 시간 보내라며 빵들과 함께 유유히 떠났다. 하마터면 차도 안 다니는 한적한 도로에서 표류할 뻔했다. 우리는 나름의 고마움의 표시로 매일 시내로 나가는 길에 그 빵집을 들려 아침을 해결했다. 빵 트럭에 타본 것도, 낯선 나라의 낯선 사람의 차에 히치하이킹해본 것도 모두 진귀한 경험이었다.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우당탕탕 유럽 여행은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호러물이 아닌 시트콤으로 끝낼 수 있었다. 출국 직전까지 옆에서 이것저것 챙겨준 엄마,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도 나를 배려해주며 따라와 줬던 두 여행 동반자들, 단순히 물을 넘어 생명수를 적선해줬던 대머리 술집 아저씨, 직접 숙소 앞까지 태워다 준 빵집 아저씨까지. 어느 한 사람도 나를 생각해주지 않았다면, 좋은 여행으로 마무리되긴 힘들었을 거다. 여행도 결국 사람이 사람 사는 곳에서 하는 거라, 그림 같은 풍경이 눈앞에 있어도 최고의 여행으로 기억될 수도, 최악의 여행으로 기억될 수도 있다. 좋은 곳을 가는 것보다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신파 같은 말을 이제는 이해할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