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이어폰으로 회귀. 이게 힙이라던데요?

by 재연


에어팟 대신 줄 이어폰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왕 사야한다면 가장 최신으로, 좋은 제품을 사려 하지만 이왕 사야하는 단계까지 잘 가지 않기 때문에 전자제품에 큰 욕심이 있는 편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내 에어팟은 에어팟 1세대로 몇년 전 따끈따끈한 신제품일 때 생일 선물로 받았었다. 그 이후로 나온 것들이 에어팟 프로, 에어팟 2세대, 에어팟 프로 2세대...관심없는 나로선 무슨 차이인지도 모르겠지만 에어팟 1세대 이후로 줄줄이 소세지처럼 신제품들이 쏟아져나왔으니 내 에어팟은 그 중 가장 조상격이다. 2년 정도 사용하면 기가 막히게 성능이 뚝 떨어져 결국 신상을 살 수 밖에 없게 하는 애플 제품의 특성을 고려하면 2년보다도 훨씬 오래 된 내 에어팟은 이미 진작에 수명을 다 한 것일지도 모른다. 원래 정상적이라면 배터리가 부족할 때 똑-똑-똑- 소리를 내며 음량이 작아지는 것으로 신호를 줘야하지만 내 에어팟은 스파크 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급사해버린다. 충분히 배불리 충전을 해주었는데도 집을 나온 지 얼마 됐다고 밥 달라며 파업을 해버린다. 그 정도 썼으면 이제 놓아줘라..그만큼 오래됐으면 당연히 고장나지..할 수도 있지만 새로 나온 에어팟 가격을 보면 다시 심폐소생술을 연마하게된다. 성능 빵빵한 블루투스 스피커가 있어 집에 있을 땐 충분히 내 방을 근사한 음악감상실로 만들 수 있다. 두 귓구멍을 막아줄 것은 오로지 밖에 나가 있는 시간에만 필요한데, 나는 그 엄청나다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에도 별 관심이 없다. 오히려 좋아하지 않는다. 자전거나 무법 오토바이들이 쌩쌩 지나가는 길에서 노이즈 캔슬링은 위험하기 짝이 없을 뿐더러, 노래가 적당한 외부 소음과 뒤섞이는 것을 더 선호한다. 이런 저런 개인적 취향과 약간의 귀찮음, 그리고 날이 갈 수록 포악해지는 애플의 가격 횡포에 더 이상 돈을 헌납하고 싶지 않다는(물론 지금 갖고 있는 아이폰을 바꿀 때가 되면 또 아이폰을 찾을 것임) 지조로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에어팟에 애써 예쁜 고무 케이스를 씌워주며 사용중이다.



그러다 최근에 틈만 나면 파업해버리는 에어팟에 짜증이 나 비상용으로 고이 묵혀뒀던 옛날 줄 이어폰을 꺼냈다. 엉켜있는 줄을 풀어준 다음 귀에 쏙 넣어 음악을 틀어줬는데 당연하게도 노래가 아무 이상 없이 잘만 들렸다. 몇년을 안썼는데 아직도 좋은 음질을 뿜어내는게 괜히 신기해 이리 저리 살펴본다. 마치 "주인님 저를 찾으셨나요..?" 하고 열심히 재롱을 부리는 것 같다. 에어팟이 새로 나왔을 때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군가는 매일 실타래같이 꼬여있는 줄을 풀어 쓰는게 짜증났는데 너무 획기적이라며 줄 이어폰 가격의 몇배인 에어팟을 덥석 샀고, 누군가는 줄 없이 귓구멍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게 어딘가 우스꽝스럽고 콩나물 같다며 비웃기도 했다. 그렇게 몇년이 지났고 이제 지나가는 사람 중 열에 아홉은 모두 하얀 콩나물 ㄷ두개를 귀에 꽂고 다닌다. 나는 유행을 선두하거나 오히려 유행을 역행하면서 또 다른 유행을 선두하는 것에는 전혀 흥미도 용기도 없는 편이다. 아무도 내 콩나물에 줄이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겠지만, 괜히 구시대적이고 고루한 사람으로 비춰질까봐 살짝 망설여졌다. 그래도 노래 없이 장시간 버스를 타는 건 더 후회될 것 같아 우선 챙겨 서둘러 나갔다.






그 날 하루 나의 줄이어폰 첫 재사용기 후기는 '대만족'이다. 왜 우리는 몇배는 더 비싼 에어팟을 사놓고 배터리를 충전했는지 안했는지 매번 확인해주는 번거로움을 감수했나? 왜 접촉 불량 등 알 수 없는 이유로 왼쪽 오른쪽이 다르게 충전되어 하루 종일 왼쪽 귀만 혹사시키는 걸 견뎠나? 줄 이어폰은 주머니에 쏙 넣어주는 것만 까먹지 않으면 하루종일 언제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함이 있었다. 물론, '에어팟을 껴야 능률이 올라갑니다'하면서 머리카락 안으로 숨길 수 있는 기능은 없지만, 듣고 싶을 때 언제든 들을 수 있다는 가장 원초적인 편리함이 탑재되어 아무 무리 없이 훌륭하기만 했다. 요즘은 오히려 줄이 있는게 '진짜 힙' 이라고 어디서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주류에 맞서는 비주류, 다수에 맞서는 소수는 어딘가 개성있고 자기만의 세계가 뚜렷한..아날로그..y2k 감성.. 뭐 그런 느낌인가. 어쨌든 그냥 지금 갖고 있는 에어팟이 너무 낡고 불편해서 쓰게 된 줄 이어폰이 힙해보인다면 의도치 않은 땡큐다. 노래를 듣다 전화가 와서 반사적으로 줄을 빼고 받으려고 했는데 실수로 통화 버튼을 눌러버렸다. 이어폰 구멍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줄 이어폰도 통화가 됐었네? 몇 년 지났다고 그새 잊어버렸다. 내 기억 속에서 골동품처럼 왜곡된 이어폰이 사실은 웬만한 기능은 다 하고 있었다는 것. 노이즈 캔슬링이 없다는 것과, 엉키는 줄만 참으면 문제없이 쓸 수 있다는 것(그것도 다 고정시킬 수 있음). 이거 요물이네! 걸을 때 같이 달랑달랑거리는 줄도 은근 귀엽다. 나 노래듣고있어요!를 아주 선명하게 알려주며 달랑거리니 의도치 않게 옆사람 말을 듣고도 무시한 것처럼 보일 불상사도 안생기겠다. 엄청난 신제품이 출시돼서 지갑이 저절로 열리지 않는 이상 당분간은 이 귀여운 줄 이어폰을 애용할 것 같다. 버리지 않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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