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이불 밖 찬 공기와 부딪히는 살의 면적은 최소한으로 고정해둔 채 핸드폰으로 열심히 인터넷 세상을 떠돌고 있던 중이었다. "이제 퇴근한다! 일 다 끝내놓느라 오늘은 좀 늦었네. 뭐하고 있어?" 남자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아직 퇴근을 못하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카톡 알림에 찍혀있는 11시라는 시간에 놀라 부리나케 대화창을 켰다. 내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거실에서 티비를 좀 보다 방에 들어와 이것 저것 깔짝거리고, 씻고 잘 준비까지 마친 상태로 이불 속으로 안착할 때까지, 그 모든 시간동안 그는 고요해진 사무실에 갇혀 모니터 앞에서 일하고 있었을 것이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내가 할 수 있는 온갖 위로의 말들을 생각해내고 있다가 새삼 그의 평온한 말투에 생각이 멈췄다. 우선 야근 후 퇴근하는 말투에 응당 있을 법한 짜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그는 '좀' 늦게 퇴근한 것이 아니라 명백히 '아주' 늦게 퇴근한 것이었으며, 세상 만사가 다 피곤할 상황에서도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을 게 뻔한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여유까지 있었다. 나였다면 이미 야근이 확정된 순간부터 죽는 소리를 한껏 해대다가 망할 놈의 회사라며 이 욕 저 욕 아는 욕은 모두 총동원해서 불평 불만을 퍼부었을 것이다.
나와 남자친구는 아주 많은 부분에서 반대되는 사람이다. 그는 데이트마다 아무거나 먹어도 맛있게 먹는 반면 나는 늘 먹고 싶은게 뚜렷하다. 그는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남의 시선에 크게 개의치 않는 반면 나는 과도할 정도로 남의 눈치를 많이 보고 그래서 어떨 땐 쓸데없이 손해를 보는 타입이다. 나는 현재와 미래를 비판적으로, 때론 걱정에 휩싸여 비관적으로까지 생각해 스스로를 코너로 몰아버리는 성향이지만, 그는 더 안좋은 상황에서도 돌파구를 찾아내는, 그간 본 사람 중 가장 긍정적인 사람이다. 나는 슬픈 영화를 보면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울고 보는 극F인 반면에 그는 그런 슬픈 장면을 보는 와중에도 궁금한게 생기는 T 인간이다. 그 외에도 남자친구와 오래 만나오면서 지금까지도 종종 정말 다름 인간임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는 스트레스에 대한 역치라 할 수 있겠다. 원래도 탁월한 능력의 소화기관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 그는 스트레스라는 것도 크게 받지 않는 성격이라 아픈 일이 거의 없는 반면, 나는 현대인이라면 모두 품고 산다는 과민성 대장 증후군, 만성 위염, 두통 등등을 모두 빠짐없이 구비하고 있어 자질구레한 병치레가 잦다. 만병의 근원이라는 스트레스를 100이면 100 모두 피부로 받아들이는 사람인지라 가끔은 이런 나약한 몸뚱이를 저주하곤 한다. 최근 조직 내 윗사람의 변심으로 남자친구와 그의 팀 사람들이 일 년간 해오던 일이 모두 엎어지고 무산되었다. 일 년동안 열심히 해온 일이 말짱 도루묵이 된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분에 못 이겨 몇날 며칠 머리만 쥐어뜯고 있을 일이다. 하지만 그냥 지금까지 열심히 했는데 조금 짜증난다는 말 한마디와 같은 팀 사람들과의 술자리로 훌훌 털어내는 그였다. 물론 이미 일어난 일을 구태여 말로 이러쿵저러쿵 풀어봤자 달라질 건 없다는 평소 그의 이성적 사고의 판단으로, 나에게 한탄하는게 의미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말을 아낀 것일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 됐든, 크게 동요하지 않는 그의 감정 폭에 또 한번 놀랐다. 나였다면..? 이미 그 윗사람은 저주인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며 나는 어딘가의 병실에 몸져 누워있었을 것이다.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끌리는 사람이 있고, 또 비슷해서 거부감이 드는 사람이 있다. 반대되기 때문에 서로를 당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서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결국 그 강을 건너지 못하고 가까이 지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비슷할 수록 더 잘 맞는지, 오히려 달라서 더 좋은 지는 그간 쌓인 인간관계의 데이터를 봐도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나의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비슷해서 좋지만, 동시에 내가 싫어하는 나의 성격까지 닮아버렸기 때문에 안맞을 수도 있다. 그럴 땐 그 지점에서 오히려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그 사이의 구멍을 채워주기 때문에 더 끌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사람은 너무나 복잡하게 꼬여있는 개체라 나와 너무 비슷해보이면서도 절대 닮을 수 없는 구석이 보일 때가 있고, 모든게 반대되는 사람같다가도 어딘가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 어디까지나 사람마다 다른 문제인 것 같다.
반대되는 사람과 몇년을 신기하게도 별탈없이 지내면서 종종 그런 순간들을 겪는다. 어떤 상황에서 나와는 전혀 다르게 대처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보게 된다거나, 같은 하루를 보내도 다르게 해석해낼 수 있음을 알게되는 순간들. 그렇게 서로의 간극을 채워간다. 그러면서 스스로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기도 한다. 마치 상대와 나의 콘트라스트가 클 수록 내 색이 더 또렷이 지각되는 것처럼. 그를 보면 신기하게도 나와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를 이해하려 할 때 동시에 나를 발굴하는 경험을 자주 한다.
가까운 사람과는 점점 닮아간다는데, 닮고 싶은 구석이 많은 상대라 행운이다. 그는 좀 손해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