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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연 Apr 05. 2023

애증의 마음으로 다시 카메라를 든다


어렸을 적 영국에서 3년을 살면서 유럽 곳곳을 참 많이도 다녔었다. 영국의 수도 런던에 붙어 있는 외곽, 우리나라로 치자면 경기도에서도 서울과 엄청 가까운 분당 정도 격인 동네에 살았었다. 주말만 되면 런던 시내로, 어떨 땐 조금 더 외곽으로, 근교로 나들이를 갔다. 그리고 언니와 나의 방학이 시작되면 배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고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 여행을 갔다. 

아빠는 예나 지금이나 지리적 감각이 타고나서 아빠가 이끄는 여행들은 늘 성공적이었다. 책자에 나오는 주요 관광지만 도장 깨듯이 찍는 여행이 아니라 "이쪽 길로 한번 가볼까?" 하며 발을 딛었다가 더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게 되는 식이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 반질반질하게 닦인 길에서 조금만 몸을 틀어보면 어딘가 거칠고, 비밀스러운 길이 있었다. 아빠는 대게 후자를 택하는 편이다. 그리고 아빠를 뒤따라간 그 길 너머에는 놓쳤으면 아쉬웠겠다, 싶은 풍경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 여자를 데리고 교통편, 숙소, 식당, 코스까지 전체적인 여행의 윤곽을 잡는 건 늘 아빠의 몫이었다. 여행을 가는게 마냥 신났던 초등학생이라 여행 전 아빠가 얼마나 준비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철저한 사전 계획이 뒷받침됐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거실에서 한번 더 고개를 꺾어야 보이는 작은 서재 겸 컴퓨터 공간에서 아빠는 여행 책자를 뒤져보고 인터넷으로 먼저 간 사람들의 후기를 보면서 대략적인 여행의 밑그림들을 열심히 그렸을 것이다. 




여행에서 아빠는 작은 은색 디지털 카메라를, 엄마는 조금 더 큰 캠코더를 들고 다녔다. 아빠는 사진, 엄마는 영상 담당으로 분업이라도 한 걸까. 그 두가지로 언니와 나의 모습을 담기도 하고, 입이 떡 벌어지는 아름다운 풍경 앞에선 열심히 셔터와 레코드 버튼을 누르며 기록하기도 했다. 엄마, 아빠도 유럽은 처음이었을테니까. 




유럽을 가면 지겹도록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성당이다. 허공을 찌르는 뾰족한 첨탑에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새긴 조각들로 가득한 외벽. 관광객들이 목소리를 낮춰 나누는 대화가 웅웅거리는 높고 엄숙한 층고에 햇빛을 받아 빛나는 스테인글라스까지. 무슨 시대의 무슨 양식으로 지어졌건, 경건하고 웅장한 분위기는 모두 비슷했다. 유명한 곳에 오면 발도장 찍듯이 사진을 찍는 것이 관광객의 본분이니, 아빠는 은색 디지털 카메라로 여기 저기를 찍고 엄마는 캠코더를 사방으로 돌렸다. 


아빠는 늘 대성당을 배경으로 우리를 세워두고 사진을 찍어줬는데, 나는 여행 중 그 순간이 가장 부끄러웠다. 작은 우리와 아득할 정도로 높은 첨탑의 끝까지 한 프레임에 담기 위해서 아빠는 온갖 포즈를 시도하다가 급기야 땅바닥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다들 목을 한껏 젖혀 성당 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아예 땅바닥에 누워버린 사람은 그 많은 관광객들 중 우리 아빠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신기하게 쳐다보고 가고, 또 어떤 사람은 웃으면서 우릴 바라봤다. 나는 그게 너무 부끄럽고 싫었다. 


그렇지 않은 곳들도 많지만,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종종 기분 나쁜 인종차별을 당하곤 한다. 식당에서 우리가 자리에 앉은 걸 알면서도 일부로 꾸물거리면서 메뉴판을 주지 않는 것, 옆테이블의 서양인 손님들에 비해 확연하게 무뚝뚝한 응대, 거리를 걷다보면 중국어로 말걸면서 자꾸 알짱거리는 젊은 외국인들, 등등 어린 나는 자꾸 위축됐다. 지금 같으면 '21세기에 인종차별이라니, 철 좀 들어라' 생각하고 말겠지만, 그때의 나는 동양인인 것이, 주류 속 비주류같았고, 푸른 눈에 하얀 피부를 가진 주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자꾸만 꾀죄죄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아빠가 땅바닥에 누워 우릴 찍고 그걸 보며 웃고 가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촌스러운 관광객으로 보고 무시하는 것 같아 도망가고 싶었다. 아빠는 그저 우리를 어떻게든 잘 찍어주고 싶었던 것인데 그 마음도 모르고 아빠가 부끄러웠다. 당시 찍었던 대성당 앞 사진들을 보면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와 언니 옆에서 나는 하나같이 뾰루퉁하게 입을 내밀고 있다.



눈 앞의 피사체를 어떻게든 잘 담아내려는 마음은 찍는 사람의 자세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사진이 예쁘게 찍힌다는 곳들을 가보면 스쿼트나 런지 자세를 하고 있는 남자들을 여럿 볼 수 있다. 여자친구를 앞에 두고 카메라를 든 채 엉덩이를 뒤로 뺀 엉거주춤한 자세로 찍는 사람, 다리를 한껏 찢어 본인의 키를 낮춘 채 찍는 사람. 거의 프로포즈하듯이 다리 한쪽을 꿇은 채 반지 대신 핸드폰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있다. 얼굴은 작게 다리는 길게 찍어주려는 그 마음들이 온갖 괴상한 자세들에서 절절히 느껴진다.






사진에서 사람 성격이 나온다. 요즘 사진을 배우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점이다. 사진을 찍다보면서 계속 반성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 사진들이 재미가 없고 단조롭고 싫다는 고민을 선생님께 털어놓았다. 선생님이 찬찬히 내 사진들을 보셨다. 

"재연님은 사진을 대부분 아이레벨에서 찍으시는 것 같아요. 그게 보는 사람도 가장 편하고 안정적으로 느끼긴 하지만 모든 사진이 그러면 좀 재미가 없거든요." 


카메라를 들고 걷다가 찍고 싶은 것이 나오면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선 채로 찍는다. 카메라 각도만 까딱까딱 움직이면서. 최근에 줌렌즈를 산 이후로는 앞뒤로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줌만 당긴다. 로버트 카파라는 유명한 사진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물리적 거리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충분히 더 다가갈 수 있음에도 내가 만든 어떤 가상의 선을 긋고 그 이상으로 더 가지 않았다. 선뜻 무언가를 하지 않는, 기존의 것을 잘 바꾸지 않고 늘 하던 것만 하는 내 성격이 여기서도 나온다니. 소름이 끼쳤다. 사진에서도 그게 나오는구나.  


예술의 세계를 늘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며 호시탐탐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나지만, 솔직히 나는 예술성이나 창의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사람이다. 하던 걸 묵묵히 열심히 하는 것은 잘하지만 그 옆의 길을 가볼 생각까진 하지 못한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같달까. 새로운 걸 시도하거나 과감하게 틀어버리는 건 내가 가장 못하는 것 중 하나다. 



남 눈치는 또 어찌나 보는지. 천재가 아닌 이상, 사진은 첫 컷에 완성될 수 없다. 셔터스피드를 느리게 해서 찍었다가, 찍힌 사진을 보고 더 늘려야겠다, 하고 더 늘려보고, 이것 저것 카메라 기능들은 만지고 조작해봐야 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잘 담기려면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다. 많이 찍어볼 수록 손에 익으니 그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뿐이다. 다른 구도로도 찍어봐야한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구도를 시도해야한다. 그런데 나는 얼른 찍고 말아버린다. 2-3장 찍어보고선 이건 잘 안 나오네, 포기해버린다. 얼른 비켜줘야할 것 같아서, 기다리는 사람이 지겨울까봐, 찰칵 몇번에 얼른 카메라를 거둔다. 찍는 상황마다 빛도, 공기도, 질감도, 형태도, 주변 사물도 다르니 원샷 원킬은 어림도 없다. 적어도 나같은 초보자는 말이다. 


베스트 샷 하나를 만들기 위해선 인내심과 적당한 뻔뻔함이 필요하다. 먼 이국 땅 바닥에 벌러덩 누워 사진을 찍었던 아빠도, 흡사 변기에 앉아있는듯한 요상한 자세로 사진을 찍던 수많은 사람들도 잘 찍기 위한 일념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이제서야 아빠를 부끄러워했던 것을 반성한다. 아빠는 사진을 순수하게 진심으로 찍는 사람이었구나. 





사진은 왜? -> 무엇을? -> 어떻게?의 과정으로 찍어야한다. 물론 예술은 확신의 한 문장으로 가타부타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추구하는 사진은 그 과정을 거친다. 내가 왜 찍고 싶은지, 어떤 이유로 찍고 싶은지를 생각하고, 그렇다면 무엇을 찍어야하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론 그 무엇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명료하고 멋지게 표현할 수 있는지 기술적으로, 방법론적으로 생각해야한다. 프레임 안에 무엇을 빼고 무엇을 더할까. 초점을 나가게 할까, 대비를 더 줘볼까, 저 부분은 과감하게 가려버릴까, 등등. 내 눈에 자꾸 걸리는 걸 찍어보라는 선생님의 말에 '무엇을'에만 집착했다. 사냥감을 찾는 사냥꾼처럼 다녔다.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다녔을 뿐이지 사냥꾼의 마음으로 다녔다. 심지어 내가 찍고 싶은 것, 내 눈에 좋은 것, 누가 뭐래도 내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남들의 기준에 맞춰 찍었다. 남들이 봤을 때 유의미하고 좋아보이는 것들, 남들이 칭찬해줄만한 것들만 쫓고 있으니 내 사진에 가장 애정을 가져야 할 나조차 재미가 없을 수 밖에. 


범생이는 딴게 아니다. 공부 잘하는게 범생이가 아니라 정해진 대로, 입력된 값대로만 융통성 없이 출력하는 사람이 범생이다. 천생 범생이인 내가 그 타고난 습성을 깨부셔야만 하는 분야에 뛰어들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사진이 재밌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사진에서 그 사람이 느껴진다. 사진을 보면 이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추구하는지, 같은 세상을 살며 어딜 보고 있는지, 성격은 어떤지 많은 걸 알 수 있다. 찍은 사람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사진은 정직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땐 스스로에게 솔직해야한다. 남이 아니라 내 눈에 좋은 걸 찍어야 한다. 내가 느낀 걸 자꾸 남에게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느낌 그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한다. 그리고 내가 좋은 걸 계속 좋아하다보면 다수의 취향은 아닐지라도 누군가는 좋아해줄 거라는 믿음과 자신감이 필요하다. 그래야 나다운 사진을 찍으면서 당장 누군가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그 행위 자체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남이 아닌 나를 들여다보려 노력. 그리고 과감해지려 노력. 아름다운 것만 쫓지 않으려 노력. 이렇게 해야해, 저렇게 해야해, 무의식 속에서 자꾸만 만들어내는 틀을 부시려 노력. 노력하면 할 수록 어렵고 더 멀어지는 느낌이라 애증의 마음으로 카메라를 바라본다. 누구보다 남이 아닌 날 기준으로 놓아야 하는 사진이 정말 환장할 정도로 어렵고 동시에 매력적이다. 시작한지 얼마됐다고 이런 고민을 던져주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고민을 줄지, 사진은 정말 멋지게 고통스러운 영역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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