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의 시대로
싸지도 않은 핸드폰 요금을 지불하면서 데이터 양이 무한하지 않아 패밀리박스라는 기능으로 엄마나 아빠에게 데이터를 받아 쓴다. (억울해서 알뜰폰 요금제로 갈아타야겠다고 마음 먹은 걸 또 미루고 있다..)
월말 데이터 기근을 대비해 월초에는 밖에서 동영상을 보거나 인스타그램을 하는 건 최대한 자제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것들이 핸드폰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국 매달 말에는 탈탈 다 써버린 5G에 비해 속터지는 핸드폰 속도를 참아내야한다.
문자 하나 보내는 것조차 당연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데이터만 있다면, 와이파이만 있다면 밤새 카카오톡으로 친구와 떠들 수 있지만, 예전에는 '채팅' 이 아닌 '문자'를 주고 받았었고, 문자 양도 한달에 쓰는 요금제에 따라 달랐지만 무제한은 아니었다. 접속만 하면 되는 채팅이 아니라 하나씩 오고 가는 편지같은 개념이랄까. 심지어 문자 길이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길어지면 'MMS'로 넘어가져서 추가금이 발생하곤 했다.
지금도 핸드폰에 문자 메시지 기능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카카오톡이 훨씬 보기에 편리하고, 다양한 이모티콘으로 말을 대신 할 수 있고, 단체카톡방이나 오픈카톡방, 선물하기 등등 문자에는 없는 유용한 기능들이 있어서 문자 메시지는 아주 드물게, 꼭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한다.
문자 메시지가 주요 연락 수단이었던 그 시절, 대부분 연락하는 친구들은 매일 학교에서 보는 같은 반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꼭 개인적으로 말해야 하는 내용이 아닌 이상 딱히 문자를 하지 않았고, '싸이월드' 라는 그때의 SNS가 따로 있어 더더욱이나 하교 후에는 문자보단 싸이월드에서 만나곤 했다.
평소에는 문자를 얼마나 썼는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문자 한통 한통을 야금야금 아껴 써야하는 시기도 있었다.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겼을 때다.
전화를 하기엔 어색한 정적부터 내 숨소리까지 부끄러워 도무지 견디지 못할 것 같고, 엄마가 문밖에서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곧 죽어도 텍스트로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던 시절. 그러다가 아주 가끔씩 온 가족이 잠에 든 것 같은 밤에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죽이고 통화하던 시절.
학교에선 책상 아래로 폴더폰을 들이밀어 선생님 몰래 문자하고, 어쩔 수 없이 아침 조회 시간에 핸드폰을 수거해간 날이면 종례 시간에 득달같이 교탁으로 나가 핸드폰 전원을 켜 밀려 있는 그의 문자들을 확인하며 베시시 웃곤 했다. 수업 시간인데 너무 졸리다고, 오늘은 체육 과목이 있는 날이라 좋다고, 점심 먹고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농구를 하고 왔다고, 수업 잘 듣고 있냐고, 또 어떨 땐 보고 싶다는 말을 빙빙 돌려 한 문자들이 하나씩 징- 진동을 울리며 차례로 화면에 뜨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답장을 하고 나서도 받은메시지함을 보고 또 보곤 했다.
그땐 폴더폰을 딱 열면 '문자 메시지 1개가 도착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같은 문구가 먼저 떠서 확인을 한번 더 꾹 눌러줘야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작고 하얀 네모 모양 바탕에 대답을 빽빽하게 채워 보내기를 누르면 편지 봉투를 접어 멀리 날라가는 듯한 화면이 떴다. 그 화면이 뜨면 정말로 내 마음이 봉투에 고이 접혀 그에게 날라가는 것 같았다.
지금처럼 상대방이 내 문자를 봤는지 안봤는지 확인할 길이 없으니, 답이 올 때까지 마음이 붕붕 떴다가 진동이 울리면 그 마음은 여지없이 늘 쿵쿵 뛰었다.
그렇게 매일 늦은 밤까지 연락을 하다 한 명이 먼저 핸드폰을 손에 쥔 재 까무룩 잠에 들면 남은 한 명이"자나보네. 잘자, 내일 봐"라는 문자로 조용히 둘의 하루를 같이 닫았다.
그렇게 매일, 하루종일 문자를 주고받다보면 금방 정해진 문자 양을 다 썼다. 문자를 더 하고 싶으면 편의점에서 '알 충전'을 해야했는데, 예를 들면 문자 100개치를 1000원 정도를 내고 충전해서 더 쓸 수 있는 방식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편의점에서 알을 충전하는 횟수는 더 빈번해졌다.
급하게 슬리퍼를 신고 집 앞 편의점으로 뛰어가 충전하고 얼른 그의 문자에 또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누르고, 뭐라고 할까 눈알을 굴리며 고민도 했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을 때나 사진을 보내고 싶을 때면 긴 MMS가 오고 가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문자 한통의 무게랄까, 정성이랄까, 지금의 카카오톡 한 줄과는 달랐다.
지금이야 한 문장도 3-4개씩 줄을 끊어서 "아 근데" / "나 이거 가보고 싶은데"/ "[사진]"/ "언제 갈까" 보내고, 떠오르는 대로 바로 바로 더 보내지만, 그땐 너의 말에 하고 싶은 대답을 문자 한 통에 잘 다듬어 보냈다. 문자 하나에 작은 마음도 하나 끼워넣어 보내는 느낌이랄까.
문장들이 빼곡한 문자에는 마음까지 꽉찼고, 텅 빈 하얀 화면에 짧은 단답만 있을 땐 마음도 텅 비어 썰렁해졌다. 그렇게 마음 하나를 보내고 마음 하나를 받았다.
가끔은 모든 행동에 시간을 더 들여야해서 불편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더 좋았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너의 사진이 보고 싶은 날엔 핸드폰 사진첩에 소중하게 저장해둔 사진을 들춰보고, 그걸로도 성이 안찰 땐 컴퓨터 데스크탑 전원을 켜서 너의 싸이월드에 있는 사진들을 봤다. 친구들의 생일을 핸드폰에서 알아서 알려주지 않아 따로 달력에 적어두고 선물을 주고 싶을 땐 직접 만나서 주거나 우체국으로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싸이월드를 콕 찝어 들어가지않는 이상 그들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알 수 없어 우리의 대화는 조금씩 더 길어지곤 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게 문자 말곤 딱히 없어 자연스럽게 바깥을 구경하거나 그 날 하루를 곱씹어보기도 했다.
핸드폰으로 모든 것이 가능한 요즘,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 종종 그립다. 그렇다고 나만 회귀할 수는 없으니 눈 딱 한번 감고 뜨면 모두가 강제로 옛날로 돌아가있었으면 좋겠다는 괴팍한 생각도 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를 단순하게 설명하면 아날로그는 연속된 값, 디지털은 끊어져있는 비연속적인 값이라고 한다. 시계만 봐도 아날로그 시계는 시침과 분침의 궤적을 볼 수 있지만, 디지털 시계는 1 다음에 팅, 1이 어디있었냐는 듯 2로 바뀌어있다.
뼛속부터 아날로그적인 인간인 나는 그게 괜히 서글프다.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 편리해서 그 사이 사이에 몸으로 부딪히며 해야했던 것들이 없어지는 것이. 당장 할 수 없어서 잠시 기다려야했던 그 시간들이 이젠 필요없는 것이, 서로를 노력없이 저절로 알 수는 없어서 더 열심히 직접 알아내야했던 것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분명 모든 것이 편리해지고 그로 인해 몸이 편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가끔은 흘러가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속도 늦출 수만 있다면, 당겨서 되감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데이터가 다 떨어진 월말이라 느려터진 인터넷 속도에 애꿎은 핸드폰만 탁탁 치며 재촉하면서도 애초에 모든게 아예 없었다면..?상상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