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살에 퇴사했습니다

퇴사 후의 일상

by 재연

오전 6시 반, 누구도 일어나라 한 적 없지만 기지개와 함께 피곤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퇴사 후 첫 평일이었고, 남편의 기상 시간이니까. 아침에 유독 더 일어나기 힘든 초겨울 같은 날씨에 남편 혼자 출근 준비를 하고 나는 세상 태평하게 드르렁 자기엔 도무지 양심이 찔렸던 탓이다. 잔뜩 눌린 머리로 나가는 남편을 배웅하며 "고마워, 돈 많이 벌어와" 머쓱하게 안아주었다. 30살에 또다시 퇴사를 하고 또다시 백수가 되었다니.


퇴사를 한 건 지난주 금요일이었다. 몇 개월을 끙끙 앓다가 마침내 어떤 끈이 탁 끊기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들었고, 그날은 결국 나의 마지막 근무일이 되었다. 연말까진 버텨야지, 그래도 회사가 잘되는 걸 조금은 보고 누리고 가야 덜 억울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애써 부여잡고 있던 끈은 결국 내가 나에게 스스로 채운 목줄이었다. 희미하게 남아있던 희망 때문이었는지 미련 때문이었는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후회도 남기고 싶지 않아 지겹도록 스스로에게 되묻고 여러 밤을 뜬 눈으로 보내며 결심에 결심을 더했던 시간이 이제는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순간, 결단을 내렸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곳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스타트업의 생태계가 원래 그렇지만, 그 사이에 너무 많은 우여곡절과 부침을 겪어서인지 객관적인 숫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오랜 세월을 보낸 느낌이다. 한 동료는 나에게 회사의 역사와 온갖 풍파를 모두 지켜보고 함께 한 가장 오래된 직원이라는 의미에서 '주상절리'라는 웃픈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입사 후 잠시동안은 '내가 다니고 싶었던 회사가 바로 이런 모습이지', 스타트업 특유의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 신이 났던 시간도 있었고, 곧이어 '내 생각이 틀렸구나, 남들이 추구하는 곳은 다 이유가 있구나' 깨닫고 괴로워했던 시간도 있었다. 힘들어도 이렇게 좋은 동료들이라면 버텨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며 사람을 보고 다녔던 적도 있었고, 그 동료들을 하나둘씩 먼저 떠나보낼 때 내가 해야 하는 일에 더 집중하려 애써 노력한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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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당일, 축하 파티 겸 남편과 퇴근 후 외식을 하러 갔다. "기분이다 오늘은 내가 쏠게!" 이제 백수 신분이라 당분간은 이렇게 베풀지 못할 테니 오늘을 충분히 즐기라며 평소 눈여겨보던 식당으로 끌고 갔다. 금요일 저녁이라 한껏 핀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부딪치는 사이로 우리도 자리를 잡아 메뉴와 술을 시켰다. 오늘 같은 날은 술을 마셔줘야 한다며. 그것도 아주 맛있는 술을 마셔줘야 한다며.


그렇게 기분을 낼 겸 갔는데, 정작 먹는 내내 내 옆으로는 휴지가 쌓여 휴지 무덤을 만들고 말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나서 닦으면 또 차오르고 또 차오르고.. 아마도 식당 직원들이 남편과 나의 관계가 꽤 궁금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여자와 그 앞에서 아롱사태 전골을 맛있게 먹으면서 면 추가까지 야무지게 주문하고 있는 남성. 이 둘의 관계가 헤어지고 있는 연인일지, 시련당한 여자와 그의 친구일지, 내가 봐도 도무지 예측가지 않는 모습이라 울다가도 피식 웃었다.


"아주 힘들었던 연애를 끝낸 기분이야." 내가 내 발로 걸어 나온 퇴사인데 이렇게 기쁜 마음보다 허탈한 마음이 클 수가 있는지, 대체 이 마음이 뭘까 싶어 스스로의 감정을 곱씹어보다 나온 말이었다. 허탈함, 허망함, 배신감, 그리고 아주 조금의 해방감 같은 감정들의 소용돌이었다. 그동안 힘들어도 아침이 오면 다시 출근은 해야 하니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꾸역꾸역 다녔는데, 그 긴장이 한순간에 탁 풀린 탓이었을까. 눈물을 닦다 보면 콧물이 나오고, 콧물을 훔치다 보면 다시 눈물이 차오르는 것의 연속이었다. 사람이 살면서 느끼는 슬픔에는 참 여러 종류가 있겠다만, 이런 슬픔은 또 처음이네. 인생의 경험치가 이렇게 또 한 번 쌓여버렸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회사에서의 평범한 퇴사이지만, 이 정도의 애증이라면 나는 회사와 그간 연애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할 수 있는 게 모니터를 노려보는 것뿐이라는 게 울화통이 치밀 정도로 화가 나다가도 내가 공감했던 이 회사의 비전이 아주 몇 명에게나마 도달했을 땐 그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그래, 조금만 더 해 보자. 어쩌면 나를 자꾸 힘들게 하는 연인에게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젠 진짜 마지막 기회 주는 거야, 하는 마음 비슷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여느 연인의 이별처럼 직후엔 슬픔이, 그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땐 우린 이제 남남이라는 공허함이 찾아왔다. 지난 연애로부터 배우고, 사람을 보는 눈이 조금 더 정밀해져 그다음은 더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해피엔딩 클리셰를 기대하며 지금은 이 허함을 잘 채워야 할 때겠지. 술처럼 당장의 고통을 잊기 위한 단기 처방 말고, 당장 달콤한 인스턴트 음식 말고, 진득하게 앉아 생각을 해야 하는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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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회사로 학교, 심지어 아가들도 어린이집에 등원한 평일 낮. 이렇게나 한산하고 고요한 시간이었나. 가끔 썼던 연차와는 사뭇 또 다른 느낌이었다. 시간의 공기 자체가 다른 느낌. 아무래도 상황과 기분 때문이겠다.


매일 걷던 출근길을 걸어 출근은 하지 않고 대신 오이와 떡국떡을 사 왔다. 점심으로 휘리릭 빨리 준비해서 먹기 좋은 오이비빔밥 해 먹고, 날씨가 부쩍 추워졌으니 만두 넣고 떡만둣국도 종종 끓여 먹어야지. 잘 챙겨 먹고, 읽고 싶던 책도 몇 시간이고 읽고, 밤에 누웠을 때 다음 날에 대한 그 어떤 걱정도 없는 일상. 짧게만 누릴 수 있는 이런 일차원적인 삶을 이번 주엔 푹 즐겨봐야겠다.


퇴사 축하해, 수고했어. 이 말 들을 자격 있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