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당신과 나태하게 사는 것

by 재연



내일은 남편의 생일이다. 2018년부터 만나, 올해 결혼식을 올렸으니 부부로서는 처음 맞이하는 생일이다. 주문제작한 귀여운 레터링 케이크부터 화려하고 웅장한 홀케이크까지, 만난 세월만큼 서로 챙긴 생일 케이크의 역사 역시 유구하고 다양했다. 올해는 당 조절해야 하니까, 같이 후식으로 먹기 간단하니까 같은 실용적인 이유로 조각 케이크를 골랐다. 케이크의 크기나 가격은 서로 아무렴 상관없어진 것이 진짜 부부가 된 느낌이다.


편지지와 땡땡이 무늬 고깔모자도 함께 사 왔다. 맛있는 외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소박하게 초를 불고 편지 수여식을 할 예정이다. '두 장까지 쓸 말이 있으려나?' 편지지를 쓰려고 식탁에 앉았다. 생일, 기념일마다 비슷비슷한 내용을 쓰고 주고 읽고. 어쩌면 지난 편지에 썼던 문장이 그대로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래도 생일에 손 편지는 써야지. 어차피 읽는 사람도 눈치 못 챌걸.


11월 25일, 연말에 가까운 생일이라 그의 생일 편지에는 늘 한 해를 회고하는 내용을 쓰곤 했다. 우리 올해 이런 일이 있었지, 올해도 고마웠어, 내년도 잘 부탁해 같은. 자연스럽게 한 해를 되돌아보고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편지가 된다. 올해도 어김없이,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톡톡 치며 생각에 빠졌다.


추운 겨울의 막바지인 2월에 결혼한 우리가 또다시 차디찬 겨울을 맞이하기까지, 각자에게도 함께에게도 많은 일이 있는 한 해였다. 작년부터 채우기 시작했던 첫 신혼집에서 금방 다시 이사를 하게 됐고, 제주도로, 일본으로, 남해로, 동해로, 부모님의 허락 없이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둘만의 여행은 물론 양가 식구들과 함께 하는 여행도 떠났다. 둘의 버킷리스트였던 가수의 내한 공연도 봤고, 오빠는 1년 내내 준비하고 목표했던 하프 마라톤을 바라던 기록으로 완주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을 하면서 오빠는 묵묵히 회사를 다녔고, 나 역시 회사를 다니고 버텨내다가 결국은 퇴사했다. 퇴사 전, 하루는 근무 시간 동안 꾹꾹 삼켜내던 눈물이 집 문을 여는 순간 터져 저녁도 거르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운 적이 있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감도 안 올 정도로 울다가 결국 약속을 가있던 오빠에게 전화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통곡을 하는 나를 위해 오빠는 그날 먼저 가서 죄송하다고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달려왔다. 조명 하나 킨 채 어두컴컴한 방 침대에 쪼그려 누워있던 나에게 오빠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며, 내가 왔으니 이제 다 괜찮다며, 토닥토닥 어깨를 쓸어주었다. 그 이후로 한 번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를 듣고 냉장고 뒤에 숨어 놀라게 하려고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오빠는 내 이름을 부르며 찾다가 조심조심 안방에 들어가 이불을 걷어냈다. 그 안에서 내가 울고 있는 줄 알았다고. 이불 모양이 마침 사람 하나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봉긋하긴 했으니, 오해할 만도 하다며 웃었다. 하지만 오빠에게 그전 기억이 강렬했던 걸까, 마음 한 켠으로는 미안했다. '오빠에게도 소중한 신혼 첫 해인데, 내 우울함 때문에 어쩌지 걱정되기도 했어' 편지에 쓰며 다시 한번 미안해졌다. 집에 못 미더운 자식을 두고 온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동반자보다 보필해야 할 사람으로 느껴진 적도 있지 않았을까.


결혼 초 남편이라는 말이 낯설기만 할 때, (여전히 어색하지만) 부부보단 동거인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누군가와 앞으로 여생을 함께 할 백년가약을 맺었다는 사실조차 그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고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1년 가까운 시간을, 그것도 아주 찐득하게 행복하고 힘들었던 한 해를 보내고 나니 이제는 부부라는 사실이 조금은 와닿는다. 감기 걸린 오빠의 출근길을 배웅할 때, 혼자 집에 있다가 문득 결혼사진에 환하게 웃고 있는 우리를 볼 때 찡한 무언가가 올라오기도 한다. 그럴 땐 한 팀이 된 기분이다. 우리의 생활을 위해, 한 사람이 잠시 약해져 있을 때 한 사람이 더 애써주는 그런 돈독한 팀이 된 것 같다. 부부는 원팀이라는 말이 점점 이해된다.


약속이 없는 주말엔 가르마가 뒤엉킨 나와 까치집 머리를 한 오빠가 늦잠을 자고 일어나 설렁설렁 아침을 해 먹고 동네 산책을 한다. 점심을 과식한 날엔 소파에서 낮잠을 자다가 이럴 거면 제대로 푹 자자며 침대로 자리를 옮긴다. 좁은 주방에서 복작복작 분담해서 저녁을 차리고 챙겨보는 드라마 본방 시간에 맞춰 후식까지 야무지게 챙긴다. 오늘은 하루 종일 집에 있었으니 내일은 진짜 나가자며 가고 싶은 카페를 미리 찾아둔다. 이렇게 종종 지루하고 나태한 주말을 보내곤 한다. 그런 주말이 좀 쑤실 때도 있지만 평화롭고 따뜻하다.


'나는 내가 너무 좋고 나를 사랑해 주는 가족 사이에서 태어난 게 두렵기도 했어. 그 운이 끝날까 봐, 내 운은 어렸을 때 다 쓴 걸까 봐. 그런데 이제 오빠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진짜 내 집으로 가는 것처럼 편안하고 좋아. 오빠와 이룬 작은 가족과 가정이 든든해. 나 그냥 평생 동안 행운아인 사람인가 봐!'

오빠를 만난 것이 내 인생에 손꼽을 행운이라는 낯간지러운 말도 편지를 통해 조용히 전했다.


예전처럼 생일이라고 한껏 꾸민 차림으로 만나는 대신 이제는 둘 다 후줄근하고 다 늘어진 집 옷을 입고 챙기는 오빠의 생일이 편하고 좋다.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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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5 오빠의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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