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우리 집 이야기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영하 날씨가 예보되면서 아파트 공지 방송도 아침저녁으로 나왔다. 동파 위험이 있으니 수도관을 솜이나 안 쓰는 옷, 이불 같은 천으로 감싸라는 것. 몸이 커진 건지, 건조기에 잘 못 돌려서 작아진 건지 모를 오빠의 니트와 "이건 진짜 싫어 버려!"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내 기준에 가차 없이 탈락된 옷 몇 개로 천은 넉넉하게 준비됐다.
그러니까 이제 그 수도관이라는 것을 따뜻하게 잘 덮어주면 되는 건데.. 문제는 오빠랑 나 둘 다 처음이라 수도관이 어디에 달려있는 지를 모른다는 거다. 엘리베이터 벽에 붙은 공지문에는 분명 바닥에서 덮개를 드러내면 나오는 수도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문 앞 복도를 서성거리며 애꿎은 바닥을 몇 번이고 툭툭 발로 쳐봐도 아무것도 없다. 경비 아저씨와 관리실에 물어봐도 문 옆에 수도관 있으니 어찌어찌하라는 말만 돌아온다. 벽에도 바닥에도 아무것도 없는데 이게 뭐람. 옆집들을 봐도 고요하다. 다들 별 걱정 없는 건가?
눈에 보이는 것 중 '관'이라 부를 건 문 바로 오른쪽 벽면 위쪽에 달린 것뿐이다. 동파로 아랫집 수리비를 다 물어주고 집에서 물을 못 써서 며칠을 바깥에서 투숙하느라 돈 몇 백은 깨졌다는 건너 건너의 소식에 겁에 질린 우리 눈앞에 보인 관이라곤 이것 하나. 에라 모르겠다 뭐라도 추위에서 보호하면 좋지 않겠냐며 옷 입히기를 시작했다. 빈틈이 보이지 않게 폭닥폭닥하고 두꺼운 옷들로 둘둘 감고 혹시나 강풍이나 외부의 위협(?)으로 풀리지 않게 단단하게 동여맸다. 옆집 관들은 여전히 앙상하게 덜덜 떨고 있다. 뭔가 이상함을 그때 알았어야 했는데. "사람들 돈 많은가 봐~" 몇 겹의 옷을 껴입은 우리 집은 아기돼지 삼 형제의 막내집처럼 튼튼해 보였다. "절대 동파되지 않겠다는 우리의 의지다 의지." 하루가 지나고 며칠이 지나도 그대로인 옆집들을 오다가다 보면서 갸우뚱하면서 마음은 든든했다. 어떤 외풍에도 우리는 끄떡없다.
각 세대 입주민들이 이렇게 먼저 조치를 취하면, 그 위로 관리실 차원에서 방풍 뽁뽁이를 붙여준다. 어느 날 나가는 길에 보니 집집마다 파란색 뽁뽁이가 붙어있었다. 중간에 누락된 건지, 우리 집만 없길래 관리실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OOO동 OOO호인 데요. 동파 방지 그거 저희 집 누락된 것 같아서 요청드리려고요." "거기 수도관 문에 안 붙어있어요?" "네 저희 집은 없던데.. 근데 정확히 수도관이 어디 있는 거예요?" 이왕 여기까지 왔겠다, 바닥을 쿵쿵 밟아보고 벽을 착착 만져봐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던 그것의 정체를 물어봤다. "O호 라인이면 집 옆에 말고 그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 있는 벽에 수도계량기랑 수도관 있어요~"
맙소사. 그러니까 엘리베이터와 가장 가까운 호수인 우리 집은 문 옆이 아니라 몇 발자국 더 가야 수도관이 있는 것이었다. 이리저리 전화해 봐도 명확히 알려주는 사람 하나 없어 답답했던 체증이 친절하고 무심한 아저씨의 말 한마디에 쑥 내려갔다. 드디어 가면을 벗게 된 수도관의 정체. 후련함과 동시에 갑자기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우리 층 사람들은 그럼 지나다니면서 우리 집을 보고 뭐라고 생각했을까. 쓸데없이 꽁꽁 야무지게도 동여맨, 쓸데없이 앙증맞은 살구색 니트도 껴있는 우리 집. 모르긴 몰라도 '이 집 처음 이사 왔구나' 정도는 생각했겠지.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가는 길에 우리 집이 유난히도 한눈에, 단숨에 들어왔다. 수많은 집 중에 혼자 알록달록한 장식을 한 집. 멀리서 봐도 뒷구르기하면서 봐도 우리 집이다.
집이 작아 크리스마스트리는 꿈도 못 꾸고, 벽에 리스라도 걸까 작은 장식품이라도 사서 선반에 둘까 고민만 하다가 크리스마스가 성큼 다가온 때였다. 하물며 우리 집은 1층도 아닌데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이토록 효과 강력한 장식이라니. '크리스마스네 크리스마스야.' 생각하며 공동현관을 지났다. 이후에 가족들과 손님들이 놀러 와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인터폰 화면에서는 다들 하나같이 오른쪽 위를 쳐다보고 있다. 문을 열어주면 "근데 저거 뭐야?" 묻는다. 엄마는 올 때마다 아직도 안 풀었냐며 깔깔 웃는다. 집 앞에서 잠깐의 엔터테인먼트라도 줬으니 다행이다. 이번 겨울이 지나면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조용히 옷을 풀러 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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