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차 프로가 쌩얼로는 결코 회의실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
나는 프로다. 24살부터 회사라는 곳에서 일을 시작해, 중간에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허송세월을 보냈던 구간을 합쳐도 20년이다. 20년 직장 생활에 프로로서의 깊이를 더하는 것은 무엇일까?
팀장과 임원의 잔소리에 듣고 있는 척하지만 안 듣는 고도의 테크닉,
막말을 하는 무례한 인간들을 지성인으로서 무대응으로 맞서는 지혜로움,
최소한의 노력으로 많은 노력을 한 것처럼 장대한 서사를 써 내려간 PPT 장표를 작성하는 극강의 스킬,
마치 피아노를 치는 것과 같이 우아한 손놀림과 손목 스냅을 활용해 키보드와 혼연일체의 무희를 통해 완성하는 회의록까지.
수도 없이 많은 스킬이 내 안에 스며들어 있다.
이제 스킬적으로는 경지에 올랐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것인가?
많은 스킬로 무장된 20년 차지만 회사에서의 고행은 끝이 없다. 나는 험난한 고행의 시간이 와도 견뎌낼 수 있는 맷집을 만들기로 했다. 내가 선택한 다음 스킬은 나를 가꾸며 내 기분을 좋게 해서, 큰 한 방의 공격이 들어오더라도 마치 태극권을 추듯 허리를 휘어 감아 공격의 타격감을 줄이는 것이다.
나를 가꾸기 위해 20대 때에는 등한시했던 화장을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면 머리가 떡지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지라 아침 시간을 줄이기 위해 저녁에 샤워를 하고 자는 스킬은 내 것이 되지 못했다. 아침에 30분 이상 공들여 샤워하는 시간에는 자연스레 명상이 가능했다. 드라이로 정돈된 머리를 보면서 오늘도 멋짐이 장착되었다고 자화자찬한다. 비비에서 파데로 갈아타 한층 두꺼워진 피부 화장 위에 볼터치를 얹는 것으로 자신감은 올라간 광대만큼이나 충만하다.
오후가 되면 호르몬으로 쩔어버릴 정수리지만, 나를 아끼기 위해 산 샤넬 헤어미스트로 나만 아는 직장인의 고오급진 짬바를 완성한다. 오늘까지 처리해달라는 이슈들이 들이닥쳐 머리를 쥐어뜯을 때, 정수리의 샤넬 넘버 5의 나만 아는 냄새가 살랑살랑 내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것이다.
사실, 3년 차 나의 후임은 회사 올 때 가끔 하는 화장품이 아깝다며 비비크림으로 대체하겠다고 했다. 역시 3년 차는 아직 세상을 모르는군. 나도 너 때는 세상 모르고 회사는 그저 일하는 곳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일잘러의 여러 스킬에 깊이감을 더하는 것은 결국 아우라다.
방금 자다 나온 것 같은 쩔어있음으로는 멱살만 안 잡았지 피 튀기는 의견 충돌이 이어지는 회의실에서 내 의견을 관철시키기 어렵다. 이때, 나만의 스킬이 발동하는 거다. 아무도 신경 썼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양껏 신경 쓴 나의 화장으로 사라진 대인공포증 덕분에 내 의견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화내는 사람에게 웃어넘기는 스킬까지 추가되면서 싸우지 않고도 내가 이긴 것 같은 기분감을 완성해 준다.
나는 회사 올 때 가장 예쁘다.
주말에 가족 나들이에는 내 전투 용품인 파운데이션과 치크를 사용하지 않는다. 집에 있을 때 그 시절 청계천 다리 밑 거지가 보아도 안타깝다며 돈을 던져줄 꼬라지로 앉아있다.
회사를 갓 들어온 애송이들아, 잘 들어라. 극강의 업무 스킬은 내면의 자존감이다.
이것이 늦더라도 나의 쌩얼을 회사에 가져가지 않는 나의 영업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