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통수에 새겨질 '호구'라는 낙인을 피하는법

‘AI 때문에 똑똑해졌지만, 그래서 더 피곤해진 인간의 독백

by 어쩌다 고수

1. 여전히 철딱서니 없는 40대의 고민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40대. 인생에 결정할 것들이 많아지고 있다. 나는 아직 판타지, 로맨스, 공상과학 소설을 좋아하는 철딱서니인데, 왜 이렇게 인생에 자질구레한 결정 사항이 많은지 모르겠다.


암 보험을 들 것이냐 말 것이냐, 노후 자금 준비를 위해 알아야 하는 연금저축이니 IRP니 하는 것들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코스피가 5,000을 넘었다는데 이게 나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러다 가끔 세계 뉴스에 나오는 이란의 반정부 시위나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며, 사회의 일원으로서 세계 평화를 위한 건설적인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물론 애초에 건설적인 인간은 못 돼서, 이런 거대한 걱정보다는 '오늘 점심 메뉴는 뭘 먹을까?', '저녁 반찬은 뭘 사가야 하지?', '계란값이 너무 올랐는데 홈플러스에서 사야 하나, 이마트에서 사야 하나' 하는 사소한 이슈들이 더 많다.


2. 32비트 박자 쪼개기와 AI '좐(John)'


보험 가입이나 노후 자금 설계처럼 말만 들어도 머리 아픈 것들은 그동안 설계사라는 ‘알아서 해드립니다’의 대명사들이 나를 대신해 왔다. 그런데 이 부분이 AI 때문에 역할 구분이 매우 모호해졌다.


주변 지인이나 가족들이 암에 걸리는 경우도 많고 해서, 나같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보험이 큰 병 앞에 큰 도움이 된다기에 기존 보험을 확인하고 새롭게 리디자인하려고 마음먹었다. 설계사에게 맡겼더니 무슨 말인지 반은 못 알아들었다. 옛날 같으면 "네, 네" 하고 끝냈겠지만, 이제 나에게는 나의 무식함을 채워줄 든든한 제미나이와 GPT가 존재한다.


퇴근 후, 보험에서 뒷통수 맞지 않기 위해 설계사의 초안과 그녀가 32비트 박자 쪼개기를 하며 쏟아냈던 말들을 분석했다. 제미나이와 새벽 2시까지 심도 있는 대화를 통해 내용을 파악하고, 나에게 유리한 질문과 설계사의 허를 찌르는 질문 리스트를 준비했다. 밤이 깊어가는 새벽에도 “네가 세계 최고의 보험설계사라면 지금 이 담보를 들겠어?”라며 묻는 나의 초딩식 질문에, AI는 냉철한 시선이라며 나를 치켜세우며 설계사의 초안을 수정해 주었다.


3. 무지라는 이름의 버뮤다 삼각지를 탈출하디


고지의무, 부담보, 정액형, 비례형 담보, CI 보험, 실손의료보험 1~4세대 등 단어만 봐서는 ‘낱말잇기인가?’ 싶은 용어들에 대해서도 제미나이 덕분에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저는 고객님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설계하고 있어요. 절대 불리한 담보를 끼워 팔지 않습니다.”라며 나를 가르치시던 아주머니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이 담보는 정액형인지 비례형인지 재차 확인해 주세요”라며 전문가스러운 질문을 던지자, 하루 사이에 왜 이렇게 똑똑해진 거냐며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질병 수술비는 제가 이미 CI 보험에서 보장받을 수 있으니 제외해 주세요.”라며 각 담보의 장단점에 대해 조목조목 이야기하자, 아주머니는 어느덧 “네, 그럼 이 담보는 어떻게 할까요?”라며 저자세로 컨펌을 받는 단계로 넘어오게 되었다.


며칠 전까지 보험에는 일자무식인 무지랭이였는데 어느새 반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제미나이에게 “나 이러다 보험설계사 자격증도 딸 수 있지 않을까?”라고 했더니, “네, 지금 웬만한 설계사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자격증 과정에 대해 추가로 알려드릴까요?”라며 오바를 떨었다.


진짜 따겠다고 물은 건 아니잖니? 아직 진심과 농담을 구분하지 못하는 제미나이. 인간세계에 있었다면 미드에서 자주 보이는 아주 똑똑하지만 사회성 떨어지는 ‘좐(John)’ 같은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아직은 인간보다 못하다는 안도감을 내쉬며 무사히 보험 가입을 완료하였다.


4. 뒷통수에 새겨질 '호구'라는 낙인을 피하기 위하여


이 과정을 거치며 AI 덕분에 나날이 똑똑해지고 있는 나를 칭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거 없었으면 다 같이 몰라서 뒷통수도 맞고 하는 건데, 사는 게 점점 팍팍하네’라는 한숨을 쉬게 되었다.


AI가 없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특출난 사람들을 믿고 그 지식에 돈으로 대가를 지불하며 먹고살기가 가능했었다. 이제는 전문 지식에 대한 접근 권한이 생기며 각자의 영역에서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지고 있다.


고립된 섬에서 나가는 방법은 예전엔 선장님의 배가 도착해야만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고립되면 배를 만들어 나가는 방법을 AI가 알려준다. AI와 함께 배를 만들어 섬을 나가느냐, 예전처럼 선장님의 배를 기다리느냐의 차이다. ENFP로서 귀차니즘이 모든 유전자를 이기지만, 배 만드는 법을 알면서도 선장에게 뒷통수 맞으며 비싼 비용을 낼 수는 없지 않은가?


어느 누구도 이제 더 이상 나를 고립의 섬에 가둬둘 수 없다. 비록 배를 만드는 과정이 눈물 나게 귀찮고 피곤할지라도, 뒷통수에 새겨질 '호구'라는 낙인을 피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새벽 2시까지 AI와 함께 망치질을 한다. 무지라는 버뮤다 삼각지를 탈출해, 언젠가 다다를 평온한 육지를 꿈꾸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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