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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J YP Jun 29. 2020

영화 #인비저블라이프 이야기

롱리뷰, 내용스포 없지만 구성 언급 있습니다

영화 포스터


아무래도 우리나라 영화를 볼 때와 먼 나라 영화를 볼 때는 기대하는 부분이 차이 나게 마련이다. 그 나라에 대한 대략적인 이미지가 셋업 된 상태에서 영화를 ‘구경’으로 보는 비중이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반면 우리나라 영화라면 일단 내가 겪은 경험의 두께에 비추어 좀 더 ‘실감’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예민해지는 것 같고.


이 부분은 영화 자체의 차이도 있지만 사실 내가 영화를 보는 컨디션 영향도 조금은 있을 것 같다. 최근 본 ‘타이베이 카페 스토리’는 거의 ‘구경’한다는 느낌으로만 영화를 봤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피곤했던 것도 그렇고. 그래서 그 영화에 대한 리뷰는 방향을 못 정해서 쓰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여하튼 영화 속에서 뭔 짓을 해도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영화 자체에 대한 감상은 좋았다)


인비저블 라이프는 사실 리뷰 사정권에 없는 영화였다. 좋은 영화일 수도 있다는 기대와는 별도로 글을 쓰는 것도 그 나름의 에너지(!)가 드는 일이니까. 최근 영화 이야기를 여러 개 쓰기도 했고.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언젠가는 반드시 이 주제로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생각이 들어 마침내 그때를 맞이한다는 약간의 비장함(?)을 가지고 키보드를 잡게 되었다.


한 사람이 이루어 낼 수 있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손 안의 스마트폰만 있어도 전파만 터진다면 혼자 외로이 떨어져 있어도 잃어버린 궤도를 찾는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가능한 영역을 아무리 늘려도 경계선에 맞닿는 것은 불가능의 영역이다. 말하자면, 가능한 것이 많아질수록 가능하지 못한 부분도 더 많이 체감되는 것이다.


그 체감은 남은 되는데 나는 되지 않는 것을 인지하는 상황에서 극대화된다. 그리고 그 상황을 재단한 표현들 중에서 계급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전에 미리 이야기하자면 우선 이 이야기는 ‘억압받는 여성’을 소재로 몰입감 있는 전개를 펼친 완성도 높은 영화이다. 다만 이 이야기를 하는 데 있어 단순히 서사에 의한 감흥에 국한하여 언급하는 것은 내가 느낀 감정을 온전히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아 길게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가 단순히 ‘말이 되는 것’을 넘어서 사람의 심장을 때린다는 표현까지 할 수 있는 부분은 영화 속 인물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작품 내에서 명확히 설정한 데에서 시작한다. 헤어진 두 자매는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만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런 노력과는 별도로 두 사람은 점점 멀어져 간다. 그 엇갈림에 계급이 있다.


그럼 이 영화는 계급에 의한 억압이 나쁘다는 것을 일컫는, 메시지를 출중하게 이야기하는 영화인가?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계급적인 억압이 분명 두 사람을 갈라놓는데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맞다. 하지만 이 계급이라는 놈은 초등학교 시절 고무줄 끊던 개구쟁이 동창 놈 같은 심술궂은 녀석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인간적인 판단이 배제된, 인간의 욕망을 위탁한 메커니즘처럼 드러난다.


영화 속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맏딸 이야기를 둘째에게 하지 않은 것을 가져다가 동생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표현을 쓴다. 물론 지킨다는 표현은 맞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자신과 둘째 딸 부부가 있어야 할 ‘계급’을 지키기 위해 첫째 딸을 ‘버린 것이다’. 막연히 가족은 소중하다니까 마지막 회에는 뭔 일이 있었건 다 같이 모여 하하호호하는 드라마들과 구분되는 지점이 이것이다.


계급은 두 사람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다.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하는 부분에도 관심이 없다. 그저 계급을 지키려는 자들이 그 위협을 거세하기 위해 힘쓸 뿐이다. 두 여성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남자들, 특히 동생의 주변에 위치한 남편과 아버지는 격한 표현 없이도 권위적인 어조와 올가미 같은 타이밍으로 그녀를 억죈다. 그 배치가 너무 절묘해서 그들이 표현하는 대사가 다소 문어체 같아 보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러기에 더욱이 벗어날 수 없는 갑갑함을 실감 나게 만든다.


인간의 삶을 뒤흔드는 계급의 존재와 힘은 두 여성이 행복과 억압을 받는 모든 상황에 기반이 되어 준다. 그래서 그녀들이 설사 기뻐하는 순간에도 마냥 이야기의 끝에 희망을 가질 수 없다. 이미 영화에 진짜로 몰입한 순간 어떠한 작가적인 터치도 진짜 결말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행복이 대체로… 엇갈렸다고 보는 사람들은 이런 점을 통해 주제를 위시한 대비적인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의견을 이야기하자면 대비되는 것은 그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계급’에 의한 것으로, 한 개인의 힘으로 사회로부터 규정된 계급을 바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런 부분에서 오히려 이 영화가 통찰력을 담은 것이 아닌가 말하고 싶다.


영화 전체에서 몰입 이상의 실감을 일으키는 데에는 두 주인공의 셋업도 한 몫한다. 홀쭉이와 난쟁이라던가 왈가닥과 요조숙녀 같은 차별화를 통한 ‘캐릭터’ 설정에 혼신의 힘을 다 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의 내재된 차이점을 강조하여 대비시키기 위한 편집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녀들의 인간적인 부분들은 그녀들이 속해있는 계급 안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드러나고 또 변해간다. 그리고 그 방향 또한 지극히 ‘계급’스럽다.


어떻게 보면 사회학적으로 보이는(?) 정이 뚝뚝 떨어지는 설명이 된 것 같은데 그래도 이 영화, 사람을 감정적으로 쥐고 흔든다. 그 원동력은 카메라다. 무정한 계급이 운명으로 군림하지만 이 카메라만큼은 그녀들의 편이다. 극 초반 낡은 필터 같은 화면이 불러내는 잠깐의 꿈에서부터 그녀들이 느끼는 기쁨과 소외 괌을 화면에 담아내는 순간. 그리고 그녀가 원한 관계가 아니었기에 그녀를 감추어 준 섹스신.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계급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은 순간... 그녀들에게 지워진 무게를 단지 관객과 함께 올곧게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데서 전달되는 감정들.


한 편의 영화에 삶을 강타한다는 표현을 쓰기는 쉽지 않다. 그것도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빛을 잃는 교훈을 넘어 인간의 삶에 담아둘 수 있는 영화라는 표현은 아끼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 너머에 대한 통찰력을 인간의 시선으로 담아낸 이 영화를 (조금 오버하자면) 현자의 헌신이라고 비유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보시길 추천드리고 싶다.





<다섯글자 느낌>

보는게고통 / 허접합니다 / 기본만한다 / 무난하네요 / 양호합니다 / 아주좋아요 / 내인생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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