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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Apr 28. 2023

나의 어중간함에 대하여

두서없이 나열해 보니 참 많다

언제부터였을까. 스스로를 어중간한 인간이라고 취급했던 게. 입시 위주의 교육에 적극적으로 반항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수긍해 미친 듯 열심히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도 아니던, 그저 학교에서 매점 가는 것이 하루의 낙인 청소년 시절부터였을까. 좋아하는 과목에선 때때로 좋은 성적을 얻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내 성적은 어중간했다. 상위권도 하위권도 아닌 중위권 정도랄까. 문제집이며 교과서 구석엔 상상 속 인물을 그려보기도 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노트에 혼자만의 생각을 적던 내 모습이 가끔 창피해서 비밀처럼 꼭꼭 숨겼다. 머릿속에 온갖 환상이 뛰놀아 무언가에 쉽게 집중하지 못했지만 겉으론 남들처럼 시험이라는 목표에 몰두하는 척했다. 그림 그리기나 글쓰기 대회에선 그래도 곧잘 상을 탔다. 대상은 못 받아봤고 은상이나 동상이나 최우수상 정도였지만.


갓 스물이 되어 자유의 맛을 알게  설레던 앳된 성인 시절.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어중간한 키가 조금 더 커 보이고 싶어서 굽 높은 구두를 즐겨 신었다. 거울 속 비친 내 모습은 운동화를 신었을 때 보다 훨씬 길쭉하고 날씬해 보였다. 힐을 즐겨 신다 보니 발가락이 아팠고 쥐가 났지만 윗동네 공기(?)는 꽤나 매력적이었다.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 순간 허공에 둥둥 떠 휘청거리는 내 모습이 멋져 보이기보단 우스워보였다. 동시에 패션 트렌드도 '운동화'에 집중하기 시작했기에 편한 신발을 신고 본연의 어중간한 키로 다시 살아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평균 언저리에 해당한다는 월급을 준다는 회사에 들어갔다. 1~2년은 새벽까지 야근을 하며 영혼을 갈아 넣어 일했지만 내게 돌아온 건 망가진 건강과 책임전가와 막말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그럭저럭 만족하며 일을 과하게 열심히 하지 않았다. 욕먹을 정도로 무책임하자는 의미가 아닌 회사 외의 내 삶을 챙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겉보기엔 무뚝뚝해 보여도 천성이 사람에 약한지라 인간적으로 잘 대해주는 상사와 동료들과 함께 일할 땐 없던 기력까지 다 빼내기도 했지만. 회사에 다니며 자기 계발을 해보겠다며 영어 학원에 다녀보기도 했다. 초급반도 고급반도 아닌 중급반. 기본 의사표현은 했지만 학창 시절 배웠던 문법적 요소들이 틀어지면 안 된다는 강박하에 머릿속은 쑥대밭이 되었고 입은 앙 다물어버리기 일쑤였다.


만나는 지인이 너무 많지도 또 그렇다고 과하게 적지도 않다. 자존심 상할 수 있는 얘기를 터놓고 할 수 있는 상대가 그래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사실에서 가끔 안도하곤 하는데 여전히 자아가 불안한 어린아이가 내면에 사나 보다.


어중간한 결과물이더라도 무언가를 꾸준히 시도하는 것에서 작은 즐거움을 찾는 이다. 깔짝대더라도 헬스장에 꾸준히 나가고, 골프 연습을 손이 아파라 한다. 얼마 전에는 처음으로 혼자 운전을 해서 고난도인 퇴근길 강남역에 다녀왔다. 서울에서 살며 늘 대중교통만 이용했기에 운전에 관심이 없었지만 갑자기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기 어려운 곳에 가고 싶을 때 누군가에게 부탁하지 않고 나 스스로의 힘으로 이동하고 싶어서 용기를 냈고 작년 장롱면허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도로연수를 받았다. 안전주의자에다가 겁이 많은 편이라 최근까지는 항상 남편을 옆에 태우고 운전했는데 이제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운전에 더 익숙해진 뒤 지금의 내 모습을 본다면 햇 병아리 같이 귀여워 보일 테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무언가를 처음 성취했을 때의 뿌듯함이 더해주는 기쁨은 여전하다.


서른이었던 해였나. 어딘가에 감정을 써 내려가고 싶어서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고 승인을 받았다. 그 이후로 익명성에 기대 브런치에 가끔씩 글을 쓴다. 매일 양질의 글을 부지런히 올리는 다른 작가님들을 바라보며 조바심이 날 때도 있지만 그저 내 속도에 맞추기로 해본다. 매일 양질의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아예 안 쓰는 건 아니고 가끔 쓰는, 어쩌다 작가라고 불리지만 출간한 적은 없는. 글 쓰는 거 좋아하고 생각 많은 어중간한 인간. 스스로 정의해 보는 요즘의 나다.


어중간한 모습이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아서 부끄러웠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좋다. 한 분야에서 최고의 정점을 찍는 것은 물론 멋있지만 그 최고의 결과물 또한 어중간한 결과물들을 도출해 냈던 수많은 시도들이 경험으로 쌓인 것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굳이 최고가 되지 않더라도 다방면에서 즐겨볼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지만.


나의 어중간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나니 이제야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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