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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Mar 05. 2021

재수 없는 날의 추어탕 눈물

마지막 남아있던 인공눈물에 초점 맞추기

그런 날이 있다. 뭘 해도 안되고 꼬이는, 그러니까 재수 엄청나게 없는 날.

공들여 멋을 낸 채 외출하자마자 정수리에 새똥을 맞고 집으로 돌아와 머리를 벅벅 감던 순간을 떠오르게 만드는 그런 날.




오전 업무를 하며 유난히 심기를 건드리는 이들과의 원치 않는 소통을 하게 된 후 격양된 감정을 느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점심시간을 이용해 30분 정도를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평소 같았으면 평화로웠을 산책시간이지만 그날따라 쌩 하고 튀어나오는 오토바이에 부딪힐뻔하기도 하고, 들어가는 골목 길마다 엄청난 인파로 혼잡스러워 좀처럼 차분해지기가 어려웠다.


단골 김밥집에 참치김밥을 포장해 가기 위해 들렀다. 그날따라 준비된 김밥이 똑 떨어져 있다. 김밥집 사장님은 다시 김밥을 말랴 점심시간 몰려든 손님들을 응대하랴 정신이 없다. 그냥 갈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사장님의 "금방 해드릴게!"라는 말에 입구 구석 한편에 어색하게 서있는다. 입구를 왔다 갔다 하는 인파들과 여러 차례 어깨를 부딪혔기에 아예 가게 밖으로 나와 문 앞에 서서 기다린다. 평소 같으면 3분이면 김밥 수령과 결제를 모두 마쳤을 텐데 약 10분 가까운 기다림 끝에 참치 김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김밥을 소중하게 들고 근처의 카페로 향한다. 화를 얻고 번 돈을 내고 커피를 사 마시면 기분이 조금 전환될 것만 같았다. 내 앞의 젊은 여자 두 명이 결제를 하고 있기에 자연스레 그들의 뒤에 줄을 섰다. 여자 두 명이 결제를 마치고 난 뒤 내가 주문하려고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어디선가 한 중년 남성이 나타나 새치기를 했다. "아메리카노 뜨거운 거!"를 외치며. 카페 직원조차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듯 그 남성의 주문을 먼저 받는다. "저 줄 서 있었는데요." 속상한 마음에 힘 없이 외쳤다. 아메리카노 뜨거운 거! 를 외치던 그의 재촉에 혼이 빨렸는지 카페 직원은 이미 카드를 받아 들고 결제를 진행하고 있었다. 새치기 한 남성은 아무 말 없이 먼산만 바라본다. 새치기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직원만 내게 미안함을 표한다. "괜찮아요."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연달아 짜증 나는 상황이 겹치고 있다는 현실을 인지하자 마음속에서 작은 불구덩이 같은 것이 피어오른다.


그렇게 자리로 돌아와 맥없이 앉아 일을 하는데 똑같은 내용을 며칠 째 계속 묻는 이가 등장한다. 마음속으로 꽥 소리를 냈다. 똑같은걸 계속 설명해 주다가 결국 얼굴은 달아오르고 화가 나 버린다. 그가 상사이기에 나는 혼자서 화를 식히다가 퇴근을 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공문서가 떠오른다. 이미 공공기관의 업무 시간은 마감되었다. 인터넷 발급 가능 여부를 확인해 본다. 가능하다는 정보를 확인하곤 집에 도착하자마자 해당 사이트에 접속한다. 공인인증서가 필요하단다. 인증서를 저장해 둔 USB가 회사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 내일까지인데.' 라며 한숨을 푹 내쉰다. 내일까지 준비해야 한다는 조급함과 오늘의 재수 없던 상황들이 겹치면서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공인인증서를 PC로 이동시키기 위해 은행 사이트에 접속한다. 매일 모바일로만 간편하게 로그인하다 보니 인터넷뱅킹 비밀번호가 헷갈린다. 결국 3번의 오류로 로그인이 막힌다. 스마트뱅킹 실명확인 센터를 통해 재설정하거나 영업점을 방문하란다. 허공을 향해 '악!' 소리를 냈다. 평소엔 아주 간단한 문제인데 머릿속이 과부하가 걸린 듯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바보가 된 기분이다.




일단 저녁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추어탕을 먹으러 가야겠다. 3일 전부터 남편에게 단골 추어탕집의 '추어 탕이 먹고 싶다'라고 계속 언급해 왔다. 하지만 그동안 다른 것들을 먹느라 계속 미뤄왔다. 그렇기에 꼭 추어탕을 먹어야 하는 날이다. 남편이 약속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집에 도착하지 않는다. '저녁 먹어야지?' 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얼마 전부터 나의 추어탕 열망을 주입받아 오던 그이기에 당연히 추어탕집에서 만나자는 신호인 걸 알 것이다. 추어탕집으로 향하기 위해 신발안에 발을 꾸겨 넣다가 느껴지는 진동에 그의 답신을 열어본다. '오랜만에 돈가스 먹을까?'


내가 추어탕을 3일 전부터 먹고 싶다고. 걸쭉하고 뜨끈한 국물과 함께 윤기가 흐르는 쌀밥과 아삭한 깍두기와 더불어 낙지젓갈을 먹고 싶다고. 그렇게 3일을 연속해서 외쳐왔는데 갑자기 웬 돈가스? 그에게 화가 난다. (물론 평소엔 돈가스도 좋아한다.)  결국 나의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남편은 바로 추어탕집으로 가겠다고 태세를 전환했다. 나는 굳어버린 머리와 얼굴을 이고 지고 집 근처의 단골 추어탕집으로 향했다. 내가 먼저 도착해 추어탕 두 그릇을 주문해 놓고 식탁에 멍하니 앉아있는다. 잠시 뒤 남편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고 나는 나의 추어탕 욕망을 돈가스로 사뿐하게 무시해 버렸던 그를 한껏 째려본다.


드디어 그렇게도 먹고 싶었던 추어탕이 내 앞에 나왔다.

소소한 재수 없음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하루를 보내서였을까. 생각보다 별로 기쁘지가 않았다. 뚝배기에 잔뜩 담겨 나온 꾸덕한 추어탕을 멍 때리며 바라보다 산초를 한 스푼 툭 덜어 넣어주고, 청양고추도 넣어줬다. 그리곤 휘휘 섞어주었다. '그래 먹고 나면 머리가 돌아가고, 먹고 나면 재수 없는 일들은 끝날 거야.'


그렇게 국물을 한입 뜨려는데, 숟가락을 쥐고 있던 손에도 재수 없음이 전이돼 버린 걸까. 국물 방울이 내 눈구멍을 뚫고 눈알을 강타한다. 산초와 청양고추를 넣고 휘휘 섞은 그 국물이.


"아..... 아아악. 악."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비명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타들어가는 듯한 눈을 부여잡고 눈구멍을 미친 듯이 꿈벅거리며 가방 속을 뒤졌다. 다행히 일회용 인공눈물이 딱 한 개 남아 있다. 그 인공눈물을 눈알에 쏟아붓고 추어탕이 뒤섞인 눈물들을 볼따구니 위로 쭉쭉 빼냈다.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눈물을 쏟아내느라 하루 동안 겪은 온갖 재수 없던 일들이 싹 잊혔다. 이 상황이 그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오고 동시에 눈이 따가워 눈물이 계속해서 줄줄 흘러나왔다. 눈알이 얼얼해진 이후 재수 없던 일들이 모두 희화화되는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그렇게 눈물 가득한 추어탕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고 가게 밖을 나오니 남편이 커피 한잔하고 가자고 한다. 평소에는 너무나도 달아 즐겨 먹지 않던 캐러멜 마끼아또를 주문했다. 오늘의 재수 없던 일들을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다 별 거 아닌 듯했다. 굳어져버린 듯했던 머릿속이 서서히 유해지는 기분이다. 재수 없던 일들은 사실 추어탕이 눈에 튄 통증에 비해선 상당히 사소했던 일들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집에 도착해  모바일을 이용하여 스마트뱅킹 실명확인을 진행한 후 인터넷 뱅킹 비밀번호를 변경했다. 분명 짜증스럽던 일이었는데 한껏 먹고, 눈물 흘리고, 웃고 나니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추어탕 국물 방울이 눈에 튄 순간, 분명 재수 없다고 생각한 날임에도 마지막 인공눈물 한 개가 행운처럼 가방 안에 남아 있었다. 막 운 좋게 남아있던 인공눈물에 하루의 초점을 맞추고 다행이라며 웃을 수 있는 사람 되는 건 여전히 어렵다.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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