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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Mar 15. 2021

망설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던 순간들

6년 전 할머니와의 여행이 유독 떠오르는 요즘

어린 시절 외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녀와 유독 친했다. 외 할아버지는 엄마가 어릴 적 돌아가셨기에 할머니는 혼자서 삼 남매를 굳세게 키워내셨다. 나의 엄마는 아들 둘 딸 하나로 구성된 삼 남매 중 막내딸로 할머니가 유독 애지중지 하셨던 것 같다. 여든이 넘은 노모인 할머니는 곧 예순이 되어가는 딸인 나의 엄마를 얘기할 때마다 두 눈을 반짝이며 "우리 딸이 참 고와."라고 했고, 사위 그러니까 나의 아빠에 대한 칭찬도 끊임없이 하곤 했다. 개인적으로 외 할머니 의 '外(바깥 외)' 표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외 할머니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 않았다. 내가 어릴 때 할머니는 서울시 강동구에 위치한 천호동에 거주 중이었다. 그렇기에 난 어릴 적 '천호동 할머니'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곤 했다. 할머니는 예쁜 양그림이 그려진 원피스를 사주기도 했고, 내가 좋아하는 떡볶이를 사주기 위해 맛있는 분식집을 알아봐 놓기도 했다. 엄마가 자주 못 먹게 하던 뿌셔뿌셔 과자를 몰래 한두 봉지 사주기도 했다.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도 항상 손에 용돈을 꼭 쥐어주곤 했다.


할머니는 처음 만난 누구와도 쉽게 대화를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싫은 건 싫다 좋은 건 좋다.' 명백하게 표현할 알았고, 본인에게 어울리는 화장품 색상과 옷 스타일을 뚜렷이 파악하고 계신 분이었다. 입맛이 확고하여 맛있는 음식은 극찬을 하며 즐겼지만 맛없는 음식을 보면 언짢아하셨다.


할머니는 내게 편하고 가까운 '어른'이었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와 친구처럼 편하게 지냈다. 그러다 보니 철없이 그녀에게 짜증을 종종 내기도 했고 "할머닌 어차피 모르잖아."라는 괘씸한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내게  "너는 고운 사람이니 고운 생각을 해라."며 예쁜 말들을 되뇌어 주었다.




약 6년 전, 내가 이십 대 중반쯤이었을 때였다. 이직을 하게 되면서 약 일주일 정도의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유럽이나 미국 등에 다녀오는 것은 무리한 기간이었기에 가깝게 다녀올 수 있는 여행지 위주로 알아보았다. 나는 가족들에게 함께 여행을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게 되면서 바빠지다 보면 함께 여행 갈 기회를 잡기 어려울 것 같았다. 당시 아빠, 여동생, 남동생은 각자 일정으로 여행 참석이 어려웠다. 엄마와 나만 여행이 가능 가능한 상태였다. 동시에 아들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상황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할머니 생각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할머니는 우리의 여행 제안에 걱정 반 설렘 반의 마음으로 첫 해외여행을 위한 첫 여권을 만들었다.


여행지는 오키나와로 정했고 패키지여행으로 예약했다. (다행히 비용은 부모님이 내주셨다.) 잠시 설렜으면서도 살짝 망설여졌다. 아무리 패키지여행이라지만 나 혼자 엄마와 할머니를 챙기고 사박 오일의 시간 동안 싸우지 않고 잘 다녀올 수 있을까 우려스러웠다. 지금 생각해보니 고민은 굉장히 오만방자했다. 여행 내내 내가 딱히 챙길 것도 없이 할머니와 엄마는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나보다 더 여행을 즐겼으니까.


가이드의 상세한 안내에도 불구하고 나는 발걸음이 많이 느려져 여행 무리에서 떨어져 걷는 할머니가 불안했다. '말도 안 통하는 이곳에서 할머니가 혼자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어쩌지'라는 고민에 발걸음이 느린 할머니 곁에 서서 재촉하곤 했다.


"따님이랑 손녀랑 여행 오셨나 봐요 어르신."

여행을 함께하던 일행들의 안부에 할머니는 "우리 딸이랑 손녀가 얼마나 착하고 예쁘냐면요~"로 시작하는 자랑 섞인 칭찬을 했고 나는 민망해하며 그런 그녀를 말렸다.


종종 일본말이 들려올 때마다 할머니는 어린 시절 겪었던 일제강점기 시절의 기억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너무 무서웠다는 감정을 여러 번 토로하며. 낯설면서도 새로운 풍경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과 기억들이 많았던지 할머니는 평소보다 더 많은 말을 했다. 그녀의 여러 말들에 나는 어느 순간 혼이 잔뜩 나가 쉽게 피곤해져 버리곤 했다. 다행히 여행 내내 할머니는 아프지 않았고 호텔 조식도 누구보다 여유롭고 다양하게 맛보고 즐겼다. 식사를 빨리 끝내고 들어가 조금이라도 더 자거나 여유시간을 즐기고 싶었던 나는 "아, 할머니 도대체 언제까지 드실 거야." 라며 징징댔다.


여행의 마지막 밤. 여행 일정을 끝내고 나니 저녁 8시가 채 되지 않았다. 낮에 관광버스에서 내려 대충 둘러보기만 했던 나하 국제거리를 혼자 걸으며 구경해보고 싶었다. 호텔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엄마는 할머니와 방에서 쉬고 있을 테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오라고 했다. 반면에 할머니는 어린애를 혼자 물가에 던져 놓는 것 마냥 걱정을 한 가득 쏟아냈다.

"말도 안 통하고 어두운데 위험하게 왜 혼자 나가냐."

위험하다 위험해를 반복하는 할머니의 우려 섞인 잔소리에 "아 할머니! 여기 안전해. 그리고 나 핸드폰도 있어! 나 여기 말고 다른 외국에서도 잘 돌아다녔어." 라며 호기롭게 호텔 밖으로 뛰쳐나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만 혼자서 낯선 거리를 걷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설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비는 더 많이 오기 시작했고 혼자만의 시간이란 것도 일정 시간 이상 지나고 보니 살짝 시시해지기 시작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을 잠시 헤매긴 했지만 편의점에서 간단한 간식거리를 사들고 무사히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내가 들어오자마자 걱정에 기반한 잔소리를 잠시 쏟아내는 듯하더니 갑자기 "우리 손녀 용감하네.", "우리 손녀 똑똑하네."라는 칭찬을 반복했다. "길은 구글 앱이 다 찾아주고 말은 번역기 통해서 잘한 건데?"라는 나의 설명에도 할머니는 그 능력들이 모두 나의 고유한 것인 것 마냥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인천 공항에 돌아와 공항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도 할머니는 쉬지 않고 여행 내내 느꼈던 감정들에 대해 속삭였다. 너무나도 피곤했던 나는 할머니 얘기의 10% 정도에만 영혼 없는 대답을 하고 꾸벅꾸벅 졸았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작년. 내가 결혼식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너 곱게 살아야 돼."라는 말을 반복했다. 마음고생, 몸고생 같은 거 절대 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결혼 전은 유독 여러 감정에 휩싸여있던 시기였던지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왈칵하고 나올 것만 같았다. 평소 츤데레 손녀였던 나는 "할머니, 나 결혼해도 멀리 안가. 그리고 누가 나 힘들게 하면 내가 알아서 안 참지." 라며 센 척했다. 


곧이어 "결혼하고 나면 아기는 낳을 거야?"라는 할머니의 물음에 나는 보통 어른들이 말버릇처럼 하는 "요즘 애들은 왜 애를 안 낳아."라는 류의 뻔한 잔소리를 예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은 내 예상과 달랐다. "아기 안 낳아도 돼. 아기 낳으면 엄청 예쁘긴 해. 그런데 엄청 많이 아프고 힘들어. 네가 낳고 싶으면 낳고, 안 낳고 싶으면 낳지 . 네가 행복한 게 최고야." 진심이 한가득 배어있는 말들에 뭉클해졌다. 그 말속에서 늘 강한 척하던 할머니의 삶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자주 힘들고 외로웠으리라 짐작해보았다.


결혼식 당일 할머니는 푸른빛 블라우스를 입고, 하얀 머리를 곱게 드라이한, 어느 때보다 더 고운 모습으로 내 옆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곤 젊은이들끼리 사진 찍어야 하는데 나이 든 사람이 방해해서야 되겠냐며 종종걸음으로 신부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정신없던 그날. 연회실에서 다시 마주친 할머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물었다. "할머니 많이 드셨어?" 할머니의 손에는 죽이 담긴 그릇이 있었다. "으응, 속이 안 좋아 요즘. 죽 먹었어." 할머니의 말에 나는 한껏 놀리는 말투로 "할머니, 맨날 소화 안된다 그러면서 다 드시잖아. 이미 엄청 많이 드신 거 아냐?" 라며 놀리며 대꾸했다. 그리곤 다른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정신없이 할머니 옆을 떠났다.




내가 신혼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안 돼서 할머니는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항상 잘 웃고 강인해 보이던 할머니가 말기암 환자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소화가 너무 안된다.", "입맛이 없다.", "배가 너무 아파서 잠을 못 자겠다." 단순히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늘어난 투정이라고 치부했던 할머니의 여러 말들은 그녀가 참고 참다가 너무 괴로워 내뱉은 말들이었다. 할머니의 병명을 전해 들은 날 소화가 안된단 할머니에게 장난으로 일관하던 내 입이 얄미워 내 입을 한대 치고 싶었다. 하지만 곧 곱게 살라는 할머니의 말이 떠올라 얄미운 입을 곱게 그냥 두었다.


아픈 와중에도 할머니는 늘 회사도 가고 밥도 해 먹어야 하고 집 정리도 해야 할 손녀를 종종 걱정했다. 항암치료를 병행하며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할머니에게 처음으로 직접 차린 밥상을 차렸다. 한 번쯤은 내가 차린 밥상을 드리고 싶었는데 더 이상 미루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할머니가 늘 차려주던 진수성찬에 비하면 초라했지만 그녀는 네가 이런 것도 할 줄 아냐며 신기해했다. 그리곤 음식들을 맛있게 드셨다. 할머니가 나를 만나기 전 진통제를 한 가득 먹고 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려 노력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곤 몹시도 속이 상했다.


할머니는 어느 순간 말 한마디 내뱉는 것도, 또 핸드폰을 손에 들고 통화를 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그런 할머니를 혼자 둘 수 없었던 부모님은 결혼 전 내가 쓰던 방에 그녀를 모셨다. 가끔씩 부모님 댁에 들릴 때면 할머니는 항상 내가 쓰던 침대에 힘없이 축 쳐져 누워있었다. "너무 아파."라는 말을 반복하며.


어느 날 침대 근처에서 잠시 서성이자 할머니가 금세 깨어났는지 어떤 말을 작게 속삭였다.

"할머니 뭐라고?"

내가 귀를 더 가까이하며 묻자 할머니는 목소리를 조금 더 크게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동원이 틀어줘."

"뭐?"

"동원이. 트로트 부르는 쬐깐한 아이. 너무 기특하고 예쁘고 대단해."

미스터 트롯을 챙겨보진 않았지만 병마와 싸우고 있는 할머니가 아픈 와중에도 찾을 정도의 프로인지 처음 알았다. 예상치 못한 할머니의 힘없는 요청에 웃음이 피식 나왔다. 리모컨을 들고 TV를 켰다. 미스터 트롯을 방영하고 있는 채널을 찾아냈고 곧 방안은 음악 소리로 가득 찼다.


"할머니 요즘은 임영웅이 인기 짱이며?"

나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정보로 할머니 옆에서 종알 댔다. 그녀는 마른 얼굴에 살짝 생기 있는 미소를 띠었다.

"영웅이는 조촐하게 잘생겼어. "

"조촐하게 잘생겼다는 게 뭐야? 칭찬이야 욕이야?"

"칭찬이지. 아주 선하게 잘생겼잖아. 나쁜 마음 안 먹을 것같이 선한 인상이지."

할머니는 힘 없이 작은 목소리로 미스터 트롯 참여자들에 대한 칭찬을 연달아 그리고 정성껏 했다.


잠시 거실에 나갔다 들어오니 할머니는 금세 잠들어있었다. TV 볼륨을 가장 작게 줄였다. 늘 내가 기대고 투정 부리던 할머니 었는데, 어느새 그녀는 많이 작고 말라있었으며 아기처럼 잠만 자고 있었다.


현재 극심한 통증이 악화되며 할머니는 나의 엄마의 보호 아래 호스피스 병동 생활을 하고 있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외출 및 면회 자체가 허용되지 않아 졸지에 보호자인 엄마까지 병원에 갇혀버린 신세가 되었다. 그 외 가족들은 병원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마음만 졸여야 하는 답답한 상황을 인 셈이다.


지난주 부모님 집에 잠시 들러 할머니가 잠시 머물었던, 내가 결혼 전 사용하던 방을 살펴보다가 우연히 6년 전 오키나와에서 할머니, 엄마 그리고 내가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속 할머니는 활짝 웃고 있었고 또 지금처럼 마르지도 않았았다.




할머니와 함께 해외여행에 갔던 것, 할머니에게 없는 실력 쥐어짜 밥 한 끼 차려 드린 것, 작은 꽃다발과 함께 짧은 내용의 편지를 가끔씩 써드린 것. 후회가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이 모든 걸 망설이지 않았던 것에 깊게 안도한다.  동시에 몇 년 전 아흔이 훌쩍 넘은 할아버지 (아빠의 아빠)를 모시고 둘만의 여행을 다녀왔던 당시 아빠의 심정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 본다.


할머니의 입원으로 몇 주간 집에 오지 못하고 있는 엄마에게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가족들이 텅 비어버린 집에서 허전함을 느낄 수 있을 아빠에게 오늘 저녁을 함께 먹자고 했다.


언제든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들이 갑작스레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깨닫고 있는 요즘. 나는 앞으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순간들에 대해더욱더 망설이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소중한 사람 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순간들을 망설이기엔 시간은 야속하게도 너무 빠르게 흘러버리니까.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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