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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Apr 06. 2021

따듯한 간병인

감사합니다

작년 11월 초, 그러니까 내가 결혼식을 치른 뒤 보름 정도가 지난 때였다. (외) 할머니의 췌장암 말기 진단에 마음 한쪽이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던 날.

진단을 받은 직후의  할머니는 '닭날개'가 맛있다며 같이 먹으러 가자며 밝게 웃거나, 혼자서 동네 주변을 산책하는 등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다. 나 또한 할머니의 소식을 접한 후 한동안 슬픔에 빠져있었으나 큰 실감을 하지 못했기에 평상시처럼 일상의 즐거움을 종종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췌장암이란 녀석은 듣던 대로 정말 끔찍한 놈이었다. 할머니는 금세 일상적인 생활을 할 기력을 잃었고 항암치료와 진통제에 의존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정신력만은 어찌나 강하던지 나를 볼 때마다 "밥 먹었냐.", "요즘 힘들지 않니?" 라며 내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할머니는 점차 죽 조차 제대로 넘기지 못했고, 핸드폰을 손에 쥘 힘 조차 잃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끝에 병원에선 더 이상의 항암치료는 불가능하다는 소견을 냈고 할머니는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했다.


코로나 19로 병원 방역 수칙이 한껏 강화되어 환자 옆에는 1인의 보호자만 상주할 수 있다. 그 보호자는 병원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보호자 역할이 장기화된다면 모든 일상생활을 접어야 했다. 현재 국내에 있는 할머니의 유일한 자식인 나의 엄마는 체력이 가능할 때까지 할머니 곁을 지킬 것을 원했다. 몇 주간의 병원생활을 보낸 뒤 엄마 또한 정신적, 신체적으로 피폐해졌고 결국엔 미루고 미루던 간병인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엄마가 잠시 일상으로 돌아와 약간의 안정을 취하는 동안 '간병인'이 할머니의 곁을 지켰다. 엄마는 할머니를 담당하는 간병인은 60대 여성분이신데 참 좋은 분인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에 살짝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나'하는 걱정에 마음을 졸였다. 엄마는 매일 같이 간병인으로부터 받는 문자를 꼼꼼히 살폈고, 내용을 가족들에게 공유했다. 그 문자를 발송하는 것간병인의 업무 중 하나에 속하겠지만 내용 상당히 상세했고 정성이 느껴졌다.


그렇게 약 이주의 시간이 흐른 오늘. 병원에서 임종에 임박했으니 직계가족에 해당하는 4인에 한하여 면회를 허용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3~4인실을 이용하던 할머니는 임종이 임박했다는 명목 하에 1인실로 옮겨졌다. 면회 대상자에 포함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하고 겁이 나 눈물이 났다. 실감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할머니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어떠한 의사소통도 불가능하다는 설명을 듣긴 했지만, 내 기억 속에는 항상 웃는 얼굴로 집 앞 붕어빵 파는 아줌마, 꽃 가게 아가씨, 빵집 청년 들과의 소소한 에피소드들과 '미스터 트롯' 이야기를 질리도록 들려주던 할머니의 모습만이 떠올랐다.


언젠가 할머니가 내게 "분홍색 입으니까 얼굴이 산다." 라며 칭찬을 했던 기억이 떠올라 분홍색 블라우스를 입고 집 밖을 나섰다. 임종이 임박한 단계로 엄마가 다시 곁을 지키기로 했다. 동시에 간병인의 업무는 오늘로서 종료되었다. 엄마, 아빠와 함께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던 2021-04-06 평일 오후 두 시쯤의 하늘은 눈이 부시게 밝고 푸르렀다. 창문을 내리면 꽃내음이 코 주위를 간질이며 맴돌았다.


코로나 19 방역수칙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면회는 10분으로 제한되었고, 2명까지만 병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병실 문을 여니 엄마가 그토록 '좋은 분'이라고 칭찬하던 간병인이 환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창문을 반쯤 열어 두어 햇살이 적당히 병실 안을 감싸고 있었다. 간병인은 할머니의 호흡이 어제보다 가팔라졌다, 손이 많이 부으셨다 등의 그간 변한 상태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붉은 혈색을 머금고 있던 할머니의 곱던 손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고 퉁퉁 부어있었다. 늘 나를 보며 종종걸음으로 걸어 나오던 할머닌 새하얀 병실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눈은 감은 채 가쁜 호흡만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겨우 6개월 전에 내 결혼식에 고운 모습으로 나타나 같이 사진도 찍었는데. (할머니는 신부대기실에서 나와 찍은 사진이 너무 마음에 든다며 그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쓰고 싶다고 했다.)


할머니를 보자마자 귀에 대고 "사랑해", "고마웠어"라는 말들을 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목구멍부터 울음이 차올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퉁퉁 불은 할머니의 손을 메 만지고 갈색 빛이 도는 흰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주었다. 간병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할머니에게 별 쓸데없는 말들. 늘 만나면 하던 말들 같은, 무뚝뚝한 말들을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할머니, 곧 엄마가 들어와서 다시 옆에 있을 거야."

"할머니 손이 많이 부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크게 하고 우물 거리 듯 말했다. "항상 고마웠어. 사랑해." 할머니는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고통을 표현하기 힘든 것인지, 가쁜 호흡을 내쉬며 힘겹게 인상을 쓰는 듯했다.


내가 씨뻘 개진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감정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쯤. 간병인이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내 퉁퉁 부은 눈을 잠시 보더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할머니께서 손녀 분 얘기를 정말 많이 하셨어요."

그리곤 그녀는 침대 맡에 놓여있던, 엄마가 할머니에게 선물해주었던 묵주 목걸이를, 할머니 팔에 살짝 감아 손에 꼭 쥐어 준 뒤 꼭 잡아 주었다.

"이렇게라도 해드리면 이 순간들이 조금이라도 편안하실 거예요."


나는 어깨를 들썩이느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간병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했습니다.' 등의 표현을 하고 싶었는데 목구멍이 메여 문장을 온전히 내뱉기 어려웠다. 그녀는 그런 내 얼굴을 보며 다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곧 할머니 곁을 다시 지키게 될 엄마와 간병인이 교대해야 할 시간이 왔다. 그녀는 할머니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살짝 목청을 높여 마지막 인사를 했다

"할머니, 저는 이제 가요. 하늘나라에 가실 때 편안하게 가셔요."


나는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고, 그녀 또한 한참이나 어린 내게 고개를 여러 번 푹 숙이며 인사하고 병실 밖을 조심스레 나갔다.


면회 제한 시간이 있었기에 나도 금방 병실 밖을 나가야 했다. 나 또한 간병인이 하던 대로 할머니 귀에 입을 조금 가까이 대고 목청을 살짝 높였다.

"할머니 내가 내일 또 올게!"


이 주간 외로웠을 할머니가 많이 걱정되었는데 따듯한 분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는 사실에 불안했던 마음이 한껏 진정되었다. 아직도 할머니와의 이별이 다가오는 것을 실감하고 싶지도,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다. '마지막'이라는 순간이 바로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르겠고 두렵다. 하지만 내 할머니가 마지막 순간을 적어도 따듯하게 느낄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집에 오는 길에 아빠로부터 간병인 분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었다. 그녀는 본인 아버지, 어머니의 임종을 끝까지 직접 지켜본 뒤 호스피스 간병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여러 노력과 준비 끝에 따듯한 간병인이 된 그녀는 누군가의 고통스러순간들에 위로가 되어주고 있었다. 작은 배려와 더불어 따듯함이 느껴지던 그녀의 말투와 행동들 그리고 온화한 미소와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마음속에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더불어 많이 지쳤을 나의 할머니와 가족들에게 따듯함을 선물해준 그녀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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