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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Apr 15. 2021

할머니의 영정사진

슬픔과 행복의 공존

지난주, 코로나로 인하여 보호자 1인 이외는 제외되었던 (외) 할머니의 면회가 임종 단계에 가까워짐에 따라 직계가족 4인 이내까지 허용되었다. 다행히 4인 안에 내가 포함되었다. 임종 단계전 일시적으로 퇴원 후 딸인 나의 엄마 집에서 머물던 할머니를 종종 보러 가곤 했었는데, 췌장암 말기의 통증에 많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굳이 힘겹게 발걸음을 떼며나 나를 배웅해주던 할머니를 기억하며 보름 만에 병실 안에 들어섰다. 그간 병세가 많이 악화되어 뇌경색까지 오게 되면서 할머니는 점차 딸인 엄마를 알아보지 못해 '엄마', 혹은 '언니'라고 불렀다고 했다. 그 와중에 사위인 나의 아빠를 간혹 떠올렸다는 것을 보면 할머니에게 사위인 아빠는 무엇보다도 뇌리 속에 깊이 박힌, 내적인 안정감을 주던 인물이었나 보다.


의식이 없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며칠 째 물 조차 섭취하지 못하고, 진통제와 수액에 의존하느라 바싹 말라버린 할머니의 얼굴, 몸 그리고 숨만 힘겹게 색색 거리며 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손이 떨렸다. 그 와중에 야윈 그녀의 발을 감싸고 있는, 곱고 예뻐서 샀다고 자랑하던, 리본이 달린 파란색 도트무늬의 양말을 보자 슬픔이 밀려왔다.(엄마가 할머니를 위해 따로 챙겨가 신겨둔 것.)


면회는 10분으로 제한되어있었고 나는 6일 연속 그곳에 방문했다. 서울성모병원 별관의 호스피스였다. 매일 고속터미널역에서 내렸고 봄햇살을 받으며 그곳에 방문했다. 할머니를 보기 위함도 있었지만 보호자의 신분으로서 오랜 기간 병실 안에만 갇혀 아픈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을 딸인, 엄마가 걱정이 되어서도였다. 병실 문을 열면 나는 미동조차 없는 할머니의 앞에 가 크게 인사하곤 했다. 삼십여 년째 내가 할머니 집에 가거나,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올 때마다 말했던 것처럼.


"할머니 나 왔어!" 이 말을 듣자마자 "너 살 빠졌어? 밥 제대로 안 먹냐?" 등의 속사포 같은 말을 늘어놓던 그녀는 아무 미동도 없었다. 가끔 눈썹이 꿈틀꿈틀 대곤 했는데 오래 감겨있던 두 눈에 눈물이 맺히곤 했다. 슬픔의 눈물인지, 고통의 눈물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너무나 고통스러운지 무의식 중에도 신음소리를 지속하여 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옆에 서서 하얗게 새었음에도 적당한 컬이 살아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면회 6일째, 나는 여느 때처럼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할머니 내일 또 올게!"라며 인사말을 남긴 채 병실 문밖을 나섰다.




다음 날. 내가 내일 또 오겠다고 한 건 서울성모병원 '별관' 호스피스로 가겠다는 뜻이었는데. 할머니는 나를 그곳의 '장례식장'으로 불러버렸다. 별관에 갈 땐 4번 출구로 나와야 빨랐는데, 장례식장은 3번 출구로 나와 육교를 건너야 했다. 2021년 4월 12일 오전. 정신없이 블로그 포스팅과 브런치 글을 쓴 뒤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아빠의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약 50분 정도가 지난 상태의 메시지였고 할머니가 결국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다. 그 날 따라 아침잠이 유난히 많던 나인데 새벽에 자연스레 눈이 떠지고, 평소보다 심장이 쿵쾅거렸기에 얼떨떨한 기분으로 평소보다 하루를 일찍 시작했다. '점심 식사 후 면회 다녀와야겠다' 고 생각했는데 왠지 평소보다 흥분된 상태의 기분이 들었다. 사람의 직감이라는 게 있긴 한가보다.


급하게 검정 옷을 걸쳐 입고 병원으로 향했다. 향기로운 꽃들에 둘러싸여 있는 고운 할머니의 미소가 담긴 사진이 내 눈 안에 들어왔다. 할머니의 영정사진이었다. 작년 10월 나의 결혼식날, 신부대기실에서 함께 팔짱 끼고 찍은 사진을 부분적으로 잘라낸 사진. 사진을 찍던 순간 그 사진이 할머니의 영정사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혼식이 진행된 후 약 보름 뒤, 할머니의 '췌장암 말기' 소식을 들은 후 함께 찍었던 사진을 인화해 보여주었는데 그 사진이 아주 마음에 든다며 영정사진으로 쓰겠다고 직접 선택하신 것이었다. 사진의 배경은 신부대기실의 꽃 장식 중 일부인 푸른 잎사귀가 싱그럽게 채우고 있었고, 할머니는 곱게 드라이한 흰머리에 아끼던 푸른빛 안경을 쓰고, 와인빛과 푸른빛 중에 무슨 색을 살지 내게 전화해 15분을 고민한 끝에 구매한 고급스러운 문양이 들어간 푸른빛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그 사진은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슬펐던 순간을 동시에 떠오르게 만드는 존재가 .


감사한 조문객들을 맞이하며 바쁜 장례의 첫날을 시작했다. 4남 2녀였던 할머니는 유일하게 생존해 계시던 본인의 '남동생'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다. 대부분 현실 남매에 가까운 에피소드들이었는데 어릴 때 남동생이 누나인 본인에게 어찌나 장난을 많이 치던지 아주 징글징글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지었다. 그렇게 누나에게 장난을 징글징글하게도 많이 치던 남동생은 어느새 노년의 모습이 되어 누나의 영정사진 앞에 서있었다. "누님, 이제 나만 남았어."라는 그의 덤덤한 말에 울컥했지만 할머니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기진맥진해져 버린 채 하루를 마무리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장례 둘째 날, 입관 (시신을 관에 넣는 과정)을 진행하며 나는 새삼 할머니와 영원한 이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두 눈이 퉁퉁 붓도록 눈물을 흘렸다. 입관실에 들어가면서는 '아, 나 우는 거 보이기 싫은데.'라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기도 했으나, 핏기 하나 없고 움직이지 않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자 손이 떨려왔다. 입관실 안은 가족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할머니 앞에 다가가 한 명씩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나는 울음으로 꽉 막힌 목소리로 "그동안 투병하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이제 아프지 말고 편안하세요." 라며 평소처럼 무뚝뚝함에 가까운 대사를 내뱉었다. 평소 꽃과 고운 색상을 좋아하던 할머니에게 푸른빛과 분홍빛이 곱게 섞인 수의가 입혀졌고, 너무나도 작아져버린 할머니의 몸이 커다란 관 속으로 폭 담겼다.


장례 셋째 날, 할머니의 관을 실은 대형버스를 타고 서울 추모공원으로 향했다. 약 1시간 정도의 기다림 후 화장로로 들어가기 전 할머니가 담긴 관에 손을 얹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관망실에서 화장이 진행되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눈물이 가끔 흐르긴 했으나 중간중간 멍했다. 화장이 끝난 후 수골실에서 그녀의 유골이 눈앞에 보이자 더 이상 방실방실 잘 웃던 내 할머니를 더 이상 못 만난다는 사실에 눈물이 수도 없이 흘렀다. 예쁜 걸 좋아하던 할머니의 평소 스타일을 고려하여 엄마가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한 유골 함안에 할머니를 모신 뒤 약 1시간 이동 끝에 선산으로 이동했고 약 40여 년 할머니 곁을 먼저 떠난 그녀의 남편. 나는 얼굴조차 본 적 없는 할아버지와 함께 모셔졌다. 그 와중에 외(外) 손주라는 이유만으로 할머니와 아주 가깝게 지냈던 나와 동생들의 이름이 묘비에 기재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섭섭함이 몰려왔다.




장례를 마친 뒤 생각보다 차분해진 감정으로 집 근처에 도착했다. 할머니가 우리 동네에 놀러 올 때마다 맛있게 드시던 고깃집과 카페가 보였다. 곧이어 지하철역이 보였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임에도 귀찮아서 '모셔다 드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표 찍는 곳에서 손 흔들며 배웅만 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그마저도 "됐어! 피곤한데 얼른 들어가!"라며 손사래를 쳤다. 분홍색 패딩에 내가 선물한 꽃장식이 달린 와인빛 모자를 쓰고, 가방엔 여우 모양 인형을 단 채 종종걸음으로 귀엽게 걸으며 '세상에~있잖니'로 시작하는 끊임없는 수다 폭격을 발사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히려 장례를 마친 뒤에야 소중한 이와의 이별에 크게 감정이 요동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곤 했는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밀린 빨래를 마친 나는 차분하게 책을 읽어 보겠다며 책장을 펼쳤지만 결국 단 한 줄도 읽지 못한 채, 아이들이 우느라 숨을 헥헥거리는 모양새로 소리 내 울고 또 울었다. 거실에서 울고 있자 남편 또한 두 눈이 붉어진 모습으로 위로해주었다. 나는 이렇게 슬플 때 토닥 거려줄 사람이라도 곁에 있지, 남편을 일찍 잃고, 또 6년 전 첫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뒤 혼자서 집에 덩그러니 앉아있던 할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혼자 많이 울었겠지. 그녀는 내게 단 한 번도 그때의 슬픈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가끔씩 혼잣말로 "혼자만 있으니 밥도 안 넘어가"라며 힘없는 목소리를 내다가 금세 '아차' 하며 밝은 주제의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리던, 전화기 속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던 나긋나긋하면서도 강렬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다.


작년 겨울, 맛있는 닭날개 집이 있다며 사주겠으니 먹으러 가자던 할머니에게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 안 먹어. 나중에 알아서 배달시켜 먹을게." 라며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 하던 그녀의 모습을 애써 무시한 채 등을 돌렸던 순간이 자꾸 떠올라서 가슴이 아팠다. 동시에 어린 시절 나와 동생의 작은 손톱에 봉숭아꽃잎을 갈아 올려 주던 모습, 목욕탕에서 내 등을 너무 세게 밀어줘서 내가 엉엉 울었던 기억, 쑥떡을 해주겠다며 아파트 단지 텃밭에서 쑥을 캐고 있던 뒷모습, 고등학생 때 동네 아저씨가 나를 연예인 집에 몰래 찾아온 애로 오인해 소리치자 갑자기 근처 어디엔가 있던 할머니가 뛰어와 "아저씨!!!!! 왜 우리 손녀한테 소리쳐요!!!! 당장 사과해요!!!!"라며 처음으로 크게 소리치며 역정을 내던 모습,  작년 내가 결혼한 이후 투병 중에도 손주 사위 생일이 언제냐고 여러 번 물어본 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남편의 생일을 소소하게나마 챙겨주시던 모습 등. 할머니는 늘 나라는 인간과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그 자체로 아껴주는 분이었다. 


단 한 번도 내게 혼을 내거나, 소리친 적 없이 늘 '곱다'며 근거와 조건 없이 예쁜 말만 해주던 그녀가 많이 보고 싶고, 살아가면서 많이 보고 싶을 것 같다. 더 이상 아무 고통 느끼지 않고 평온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녀와 함께했던 30여 년 추억을 마음속에 깊이 담아보도록 한다. 당신이 내 할머니여서 늘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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