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산골은 아닐지라도 나의 살던 고향은 아름다워라
그곳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며칠 전 친구와 성수동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뒤 친구가 알아둔 카페를 찾아 붉은 벽돌이 쌓인 골목들을 이리저리 걸었다. 익숙한 감정이 뇌세포들을 자극했다. 골목 밖으로 나와 큰길로 나오니 낯익은 아파트 단지들이 눈 앞에 나타났다. 하얀 시멘트로 가려졌음에도 건물들의 세월이 느껴졌다. 과거 기억에 기반한 민감한 깨달음이었다. 그렇다. 이곳은 약 20여 년 전 초등학생이던 내가 잠시 거주했었던 동네였다.
"와! 여기 내가 어릴 때 살던 곳이네!"
가슴속 솟구치는 흥분을 주체하려 노력하며 연신 입술을 쌜룩 댔다.
"저 집, 친한 애가 살던 덴데 그대로다!", "여기는 같은 반 애가 살아서 자주 놀러 가던 덴데 아파트 이름에 '서울숲' 문구가 붙었네. 집 값 엄청 올랐겠지?"
벽돌, 아파트 경비실, 문구점 등. 온갖 것들을 살피며 추억을 쏟아내는 내 모습에 어릴 적 살던 동네와 친구들 이야기를 자주 하던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이 겹쳐졌다. 공감되지 않는 일화들에 의무적인 끄덕임만을 반복하다가 근현대사에서 배운 역사적 사실에 바탕이 될 만한 일화 (그녀의 어린 시절은 일제강점기였다)를 들을 때서야 "어? 나 그거 알아!" 라며 사실적 요소에만 관심을 표하곤 했다.
방문한 카페는 생기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었는데 20년 전 엄마가 파마를 하러 방문하던 미용실이었던 공간이었다. 여러 번 거친 리모델링 탓에 이전 공간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커피를 마시며 한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뒤 어둑해지자 카페 밖으로 나왔다. 친구는 버스를, 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 길. 평소 같았으면 빠른 걸음으로 휘휘 걸었을 나였지만, 동네 구석구석을 살피며 천천히 걸었다. 동네의 큰 틀, 이를테면 상가 건물이나 형태 등은 그대로였지만 인테리어나 그 안의 세부적인 것들이 변해있었다. 피아노를 딩동 거렸던 피아노 학원도, 매일같이 들리던 떡볶이 가게도, 향기 펜과 번개 펜을 모으겠다며 들락거리던 문구점도, 같은 반 아이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과일 가게도, 누군가의 생일이면 늘 케이크를 사다 먹던 빵집도. 모두 사라졌다. 세련된 느낌의 가게들이 들어섰지만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공간들이 더 이상 눈 앞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섭섭함이 몰려왔다.
차도에서 빵빵 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박수 차 아저씨'가 떠올랐다. 당시 다니던 초등학교는 성인 걸음걸이로 도보 20~30분이 소요되는 거리였기에 학교까지 데려다주던 사설 봉고차들이 여럿 운영되고 있었다. 내가 이용하던 청록색 봉고차는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박수 차'로 불렸다. 하교 시에는 친구들과 놀며 걸어오곤 했으나 등교 시에는 항상 박수 차를 탔다. 박수 차를 운전하던 아저씨는 약 60대 정도의 걸걸한 목소리를 지닌 분이었다. 아이들이 타고 내릴 때마다 목청 큰, 걸걸한 목소리로 "빡~수차!"를 외치며 량현량하의 '학교를 안 갔어!'를 틀어줬다. 아침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차에 올라타는 아이들에게 기운찬 목소리로 "지혜 오늘 개나리처럼 예쁜 옷 입었구나!", "승일이 태권도 멋지다. 짱 잘 어울린다!"며 당시 애들 말투를 구사하며 칭찬을 던져주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더 이상 박수 아저씨가 아니고, 박수 할아버지겠지. 벌써 여든이 훌쩍 넘으셨을 텐데, 건강하실까.
꼬리를 무는 생각의 끝에 슬픔을 느낄 때쯤 친한 친구와 말다툼을 하던 상가 건물 앞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나는 걔와 무엇 때문에 눈을 부라리며 싸웠던 걸까. 이유는 잘 기억나진 않지만 "나 너랑 절교할 거야!"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던 나와, 그 말에 눈물을 글썽이며 훽 돌아서던 걔의 자두 알 같던 분홍빛 머리방울과 그에 묶여있던 까맣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이후 아무렇지 않게 떡볶이도 사 먹고 문구점도 같이 가곤 했으니 당시의 절교 기간이 딱히 길지 않았던 것으로 예상된다. 걔는 뭐하고 살지, 여전히 말랐으려나, 무슨 일하고 살까, 결혼을 했을까, 여전히 떡볶이를 좋아할까.
연이어 늘 커다란 유혹을 선사해주던 떡볶이 가게 아줌마, 순대곱창볶음 가게 아줌마, 목청 좋던 과일 가게 아저씨, 연필 한 다스 마저 정성껏 포장해주던 문구점 아줌마 등. 20여 년 전 그곳을 지키던 여러 사람들의 모습들이 스쳤다. 설렘과 후회, 기쁨과 슬픔 등 여러 감정들이 공존했다. 좋지 않았던 기억들도 있었지만 좋은 기억들이 우선적으로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릴 적 몇 차례 이사를 하며 여러 동네에서 살다 보니 정확히 나의 고향을 정의하긴 어려웠다. 수원에서 거주한 3년을 제외하면 삼십여 년 가까이 서울에서 거주했으니, 요즘은 누군가 내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그저 서울이라고 대답한다. 갓 태어났을 때, 미취학 아동일 때, 초등학생 때, 청소년 때 살던 동네들을 여럿 떠올리며 어느 동네를 말해야 할지 애매해 뭉뚱그려 '서울'이라고 해버리는 것이다.
'고향의 봄'의 가삿말인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과 달리 내 고향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풍성하게 지니지 못한, 회색빛 아스팔트에 더 익숙한 곳이지만 알록달록한 감정들이 꽃 대궐처럼 풍성하게 기억되기에 충분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