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스무 살이 된 어느 날. 갓 성인이 되었다는 패기를 장착한 채 우후죽순 생기던 프랜차이즈 카페들을 힘차게 드나들었다. 카페 테이블 앞에 둘러앉아 친구들과 성인이 되었다는 자유에 도취되는 것은 짜릿했다. 스무 살이 되기 전 경험한 커피라곤 고등학생 때 가끔씩 편의점에서 사 마시던 커피우유 같은 달다구리 한 커피 혹은 집에서 가끔씩 엄마 몰래 타마시던믹스커피뿐이었다.
처음 엄청난 종류의 카페 메뉴판들을 한눈에 담지 못해 당황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나 스무 살이야. 어른이라고!'라는 당당한 표정을 의식적으로 지었으나 두피 속에선 식은땀들이 삐질 올라왔다. '뭘 주문해야 하지?'가장 가격이 싼 에스프레소를 눈에 담았다. 하지만 가격이 제일 싼 건 제일 맛이 없을 것만 같다는 개인적 판단 하에 두 번째로 가격이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꽤나 날씨가 더웠기에 "따듯한 거로 드려요? 차가운 거로 드려요?" 라던 카페 직원의 물음에 "차가운 거로 주세요."라고 답했다. 그렇게 성인이 되어 처음 시킨 커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곧 한 손에 꼭 쥐고 있던 진동벨이 방정맞게 징징대며 울렸다. 투명한 유리잔 안에 까만 물감을 탄 듯한 액체가 가득 담겨 나왔다. 친구와 고속터미널역 지하상가에서 함께 구매한 9cm 하이힐을 신은 채 한껏 어색하고 불편한 모습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빨대로 그 액체를 쭈욱 빨아 입안에 한가득 넣었다.
"으엑" 순간 혀를 쭉 낼름이며 인상을 팍 썼다. 친구는 내 일그러진 표정을 보더니 "왜?"라고 물었고 나는 그녀에게 그것을 건넸다. 이런 탄 맛 나는 까만 액체를 거의 오천 원에 가까운 돈을 주고 직접 사다니. 알 수 없는 배신감에 손이 떨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살짝 들이마신 친구 또한 인상을 팍 쓰며 "야, 이거 한약 같아. 너무 써." 라며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고 쓴 맛을 달래려는 듯 본인이 시킨 블루베리 스무디를 쭈욱 빨아 마셨다. "한약은 몸에라도 좋지 이건 많이 마시면 잠도 안 온다며" 우리는 그것을 거의 독약 취급했다. 난 어른이 되었는데! 그럼 영화에 나오는 어른들처럼 커피도 후룩후룩 잘 마셔야 하는데 이렇게 쓰다 못해 못 먹을 맛이라니.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어떻게든 그것을 다 마셔보기 위해 카페에 있는 설탕시럽을 음료 안에 푹푹 담아 넣었다. 쓴 맛에 단 맛이 살짝 더해졌지만 여전히 맛없었다. 달짝지근한 믹스 커피가 그리웠다. "이건 진짜 내가 다시는 내 돈 주곤 안 사 먹는다." 라며 심오하게 속삭이며 다짐했다. 그렇게 내 첫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거의 새것 인 상태로 버려졌고 나는 당분간 그것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 뒤로 친구들과 카페에 갈 때면 대부분 단 맛이 가득한 스무디 등을 시켜 먹었고, 어느 날 우연히 맛본 '캐러멜 마키아토' 혹은 '바닐라라테' 등이 꽤나 입맛에 맞아 커피를 마시고 싶은 날에는 달달한 그것들을 주문해 마셨다. 몇 년이 지난 뒤 달콤한 시럽이 잔뜩 들어간 커피 들에 질려 갈 땐 쌉싸름한 에스프레소와 우유의 조합인 '카페라테'를 연신 들이키곤 했다. 최근의 나는내 돈 주고 절대 안 사마시겠다던 아메리카노와 더불어 우유 양이 라테보다 보다 적어 에스프레소의 씁쓰름함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플랫화이트'를 주로 즐겨 마신다. 이처럼 내 커피 취향은 십여 년간 많은 변화를 거쳤다. 단 것 중에서도 가장 단 음료를 찾던달달한 입맛은 점차 씁쓰름함을 찾아가고 익숙해져 갔다. 아메리카노를 초월해 드립 커피의 맛을 알아가며 다양한 쓴 맛을 음미하기도 했다. 산미가 있고 없는 것 등에 중요한 의미를 더해가며.
뾰족한 하이힐에 말랑한 발을 어색하게 꾸겨 넣곤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쓴 맛에 당황해하던 스무 살의 나는 어느덧굳은살 벤 발을 지키기 위해 편안한 로퍼를 신고, 독약 같던 '아메리카노'를 진짜 마시고 싶어서 내 돈 주고 사 마신다.퍼석한 스콘이나 파니니 등의 빵류로 한 끼를 급하게 때울 때 살짝 느끼해진 차가운 속을 달랠 만한 데에는 따듯한 아메리카노가 최고였고, 회사에서 바쁜 오전 업무를 끝내고 체할 듯이 빠르게 점심 식사를 끝낸 후에 정신을 차리는 데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제격이었다. 김치찌개나 부대찌개 류의 식사를 한 후 입안이 한가득 나트륨으로 가득 차 짭짜름해졌을 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셔주며 개운함을 느낀 어느 날에는 이 매력적인 액체를 독약 취급하며 웩 소리를 냈던 스무 살의 내가 한없이 귀엽게 느껴졌다. 아메리카노의 씁쓰름함 보다 더 한 씁쓰름한 감정들과 현실들을 어느 정도 경험해 본 뒤 마신 아메리카노는 가끔 달았다. 당시에는 불쾌하게 썼던 것이 현재엔 짜릿한 씁쓰름함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최근 아메리카노를 꽤 즐기던나는 요즘 '플랫화이트'의 매력에 폭 빠져있다. 시럽의 강한 단 맛은 없지만 에스프레소의 씁쓰름함에 고소한 우유의 풍미가 살짝 더해진 '부드러운 씁쓰름'에서 다가오는 미묘한 달콤한 기분을 즐긴다. 간혹 '믹스 커피'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달다구리 한 맛이 그리워 편의점에 충동적으로 들러 믹스커피를 한 박스 구매하기도 하지만. 건강 상 커피를 많이 마시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기에 하루 한잔의 커피만 즐기자며 스스로에게 제한을 두고 있다. 그래서 오늘 어떤 커피를 마실지 고르는 것은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혹은 어떨 것인지를 바라는 것인지를 뜻하는 꽤나 중요한 의식이 되었다.
달콤한 맛에 주로 익숙했기에 아메리카노의 쓴 맛에 큰 충격을 받았던 말랑말랑했던 스무 살의 내가 이따금 그립다. 쓴 맛에 꽤 익숙해진 지금의 나지만 종종 달달함에도 익숙하여 단 시럽을 가득 넣은 바닐라라테 혹은 캐러멜 마끼아또를 마셔도 그다지 달지 않게 느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