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진 우정

소녀의 격한 우정은 어른의 잔잔한 우정이 되었다

by 안나

친구 Y로부터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았다. 분홍색 캐릭터 노트를 찍은 사진이었다. 당시의 유행어들을 휘갈기며 진심을 담아 넣었던, 감수성이 폭발하던 '중2 시절'에 쓴 '우정 교환일기'였다. 소중하지만 흑역사인 그것의 존재가 묵묵히 지켜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유치한 표현법들에 부끄러운 감정이 들어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엄청난 기교를 부린 글씨체와 더불어 '우정'이라는 감정이 당시의 우리에게 엄청난 것이었음에 틀림없어 보이는 문장들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열다섯의 나는 '소중한 친구들과의 감정이 시간이 지난 뒤 변해버리면 어쩌나', '어른이 되고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 우리는 어디서 만나야 하나' 등의 고민을 아주 골똘히 한 듯했다.


그때의 우리는 꽤 자주 심각하다가 금세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숨이 넘어갈 만큼 깔깔대며 웃곤 했다. 친구들이 다 벌을 서고 있는데 나 혼자만 벌을 서지 않고 있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떠든 후에 복도 밖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좋아하는 남자애가 다른 여자애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는 친구를 달래주다가 함께 서러움을 느끼며 엉엉 울어버린다거나, 전학을 '갈지도 모른다'라는 친구의 추측에 우리의 우정이 흩어지면 어쩌면 좋냐며 대책 회의를 했고 또 한바탕 어이없이 울어버리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감정일 뿐이지만 당시엔 그러한 감정을 서로 공유한다는 것 자체에 큰 의의를 두며 소중히 여긴 듯하다.


시간이 흘러 어른의 세계를 살아가다 보니 찬란하고 널 뛰던 감정을 공유하던 여러 친구들은 기억 속에서 잠시 남아있다가 이내 희미해져 버렸다. 현실 속에서 여전히 내 곁을 지켜주던 일부 친구들과는 엄청난 감정을 쥐어짜 내며 우는 대신, 가끔씩 모여 어른이 된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술도 마시고 커피도 마셨다. 시간을 맞춰 여행을 가기도 했다. 어느 누구는 회사에 다니고, 다른 누구는 하고 싶은 경험을 하기 위해 해외로 떠나기도 했고, 또 다른 누구는 사랑하는 이를 만나 가정을 먼저 꾸리기도 했다.


30대에 진입하며 여러 사유로 지켜지지 못한 우정들은 또 한 번 자연스럽게 내 곁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서로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고 배려해주던 소수의 지켜진 우정들은 여전히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


매일 만나 함께 떠들고, 밥 먹고, 시험이 끝나면 천 원씩 모아 노래방에 가고, 편의점 컵라면을 먹으며 낄낄대던 소녀들이 현실과 숫자에 익숙해진 어른이 되어가자 분기별로 모이는 것이 전부인 상황이 잦아진다. 하지만 어색하지 않고 편안다. 소녀였던 내게 우정이라는 것은 너무 소중해서 불안한 '격한 감정'이었다면, 어른이 된 내게 우정은 가끔씩 기쁨을 주며, 사소한 요소로 서운함이 발생할 때도 있지만 또 다른 소소함으로 사그라들기도 하는, 대체적으로 익숙하며 평온한 감정이다.


격하게 서로에 대한 우정을 확인하고 표현하던 소녀들처럼 '우리 우정 절대 변치 말자' , '난 너랑 제일 친해서 너한테만 비밀 이야기할 거야.' 등의 우정을 기반한 약속과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는 책임감 부여에 대한 요구들을 더 이상 입 밖으로 표현해 내지 않는다. 우정이라는 감정에 대한 확인을 주고받는 대신 오래 쌓아온 신뢰를 기반으로 각자의 고유한 삶을 인정하고 지지해준다. 현재의 우리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고, 경험하며 즐기다가 각자의 삶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가 열심히 산다. 그 삶에 우정 외의 중요한 요소들 (가족, 사랑, 일, 여가, 그 밖의 자신만의 지키고 싶은 감정 등)이 있다는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서로의 소중한 요소들이 항상 평온하기를 바란다.


소녀의 격한 우정이 어른의 잔잔한 우정으로 모습이 바뀌어진 것처럼, 세월이 흐름에 따라 우정을 표현하고 유지하는 방법에 변화가 올 수 있겠지만 의리와 신뢰를 기반한 소중한 감정인 우정의 본질을 지켜나갈 의지는 늘 충만하게 유지하려 한다. 무수히 떠나버린 지나간 우정들 속에서 묵묵히 내 곁을 채워주고 있는 지켜진 우정들에게 새삼 클함을 느낀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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