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의 공감능력
그때의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평가하지 않았다
어릴 땐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 앉아 소소한 내 감정 혹은 비밀을 미주알고주알 나누는 것을 우정의 증표라 여겼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나는 옷에 실례를 해버리고 말았다. 당시 혼자 벗기 힘든 멜빵바지류의 옷을 입고 학교에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줌보가 터질 것 같아 화장실에 뛰어갔으나 옷을 빨리 벗지 못해 그만 옷을 적신 것이었다. 축축한 불편함 보다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알게 돼 놀림거리가 될 것이 두려웠다. 초등학생 언니, 누나가 되었다며 동네 꼬맹이들한테 으스댔는데 아기처럼 실수를 하다니. 수치스러웠다.
다행히 선생님의 빠른 대처로 조퇴 명목의 이른 하교를 했다. 겉옷으로 허리를 감싸 묶어 축축한 부분은 감춘 상태로 학교 건물 앞에 쭈그리고 앉아 실내화 가방에서 신발을 꺼내 갈아 신고 있었는데, 당시 나와 친해진지 얼마 안 되었던, 단발머리에 주황색 머리띠를 자주 쓰고 다니던 지혜가 조심스레 내게 다가왔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성 까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 아이의 이름이 '지혜' 였던 것은 확실하다.) 지혜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앉더니 가만히 주위를 살폈다. 우리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지혜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봐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혜야, 나 아파서 집에 일찍 가는 거야."
침묵을 참지 못한 내가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지혜는 내 귀에 본인의 입을 가까이 댔다. 그리곤 속삭였다. 그 또래 아이들이 즐겨하던 귓속말이었다.
"사실 나도 얼마 전에 바지에 쉬해서 집에 먼저 갔었어. 괜찮아.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1학년이면 실수할 수도 있대."
지혜도 나와 같은 실수를 했었다는 사실과 괜찮다는 말이 큰 위안이 되었다. 부끄러워하는 나의 감정을 조용히 토닥여주는 지혜의 예쁜 말들에 감동해 심장이 콩닥댔고, 수치스러웠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진짜야? 지혜 너도?"
나는 해맑게 웃으며 되물었다.
"응,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지혜는 한껏 비장한 표정으로 내 눈을 바라보았고 우리는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나 또한 비장한 표정으로 "응, 우리 둘끼리만 비밀이야."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몇 달을 붙어 다니며 친하게 지냈다. 어느 날, 지혜가 청소시간에 교실 구석에서 엉엉 우는 것을 보고 놀라 달려갔다. 왜 우냐는 나의 질문에 지혜는 동생을 낳으러 간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운다고 했다. 지혜의 슬픔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지혜야, 엄마가 엄청 보고 싶겠다. 나도 엄마가 동생 낳으러 갔을 때 엄청 슬펐었는데 엄마는 금방 오실 거야." 지혜는 두 눈이 눈물로 그렁그렁해져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그동안 쌓인 서러움을 분출해 내는 듯 더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 나는 아무 말없이 지혜의 작은 등을 토닥였다. 주체할 수없이 들썩 거리던 등이 평온해졌다. 나는 잠시 '이런 말 해도 되나' 하는 고민을 담은 표정을 짓다가 지혜에게 귓속말을 했다. "엄마 오고 나면 세일러문이랑 웨딩피치 같은 거 많이 못 보니까 지금 많이 보는 게 어때?" 나의 진지한 의견에 지혜는 곧 눈물을 거둔 채 미소 지었다.
얼마 뒤 지혜가 전학을 가게 되면서 우리는 만나진 못했지만 종종 편지를 주고받으며 소식을 주고받았다. 지혜의 편지 속 내용은 주로 엄마가 동생만 예뻐하는 것 같아서 속상하다는 내용과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데 점점 다니기 싫어진다던 내용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들로 차곡차곡 채워진 알록달록한 편지에는 서로에 대한 깊은 공감을 위한 노력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어느 순간 편지는 끊겼고 우리는 서로의 소식을 모르지만 지혜는 내 기억 속 작지만 단단하고 따듯한 친구로 남아 있다.
여덟 살의 우리는 서로의 감정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평가하지 않았다. 그저 공감해주었다. 너의 감정은 유별난 게 아니며 나도 겪어본 일이라고 괜찮다고 토닥여주곤 했다.
어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재.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꺼내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진다. 참고 참았던 고민들을 믿었다고 생각한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순간, 원치 않는 충고나 조언 혹은 평가 등이 귀에 꽂히며 마음이 다쳤던 경험을 여럿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의 고민을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거나, 현실은 더 힘들다는 등의 좁은 소견으로 평가질 하기도 하고, 조언이라는 핑계 하에 원치 않는 말들을 입 아프게 하기도 한다. "힘들었겠다.", 혹은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랬구나." 등의 평가 아닌 공감들이 더 큰 위로를 주었을 텐데.
상처 받은 이들을 어떻게 토닥여야 할지 막막할 때마다 여덟 살 지혜가 내게 보여주었던 순수한 공감과 여덟 살의 내가 상대방의 감정을 감히 평가하다는 생각 따위를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누군가에게 공감받지 못하는 것이 두려워 내 감정을 스스로 숨기려고 할 때마다 다짐한다. 스스로에게 '여덟 살의 지혜'가 되어주자고. 동시에 좋아하는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했던 예쁘고 순수했던 마음들이 그리워진다.
[이미지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