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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Aug 15. 2021

우산을 사고 나니 비가 그쳤다

내 판단이 틀릴 수 있음을 유하게 받아들이기

퇴근길, 신나게 회사 건물을 나서려는데 머리통 위로 빗물이 또르륵 떨어지기 시작했다. 점심때 흐릿한 하늘을 바라보며 실컷 내려줘도 좋으니 집에 갈 때만 똑! 그쳐달라며 마음속으로 빌었건만, 퇴근시간에 딱 맞춰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근처의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 소중한 모발들을 보호하기 위해 손바닥으로 가르마와 정수리를 꼭꼭 가려 준 채.


투명한 흰색 우산을 짚어 들었다.

"바로 쓰고 갈 거죠?"

편의점 사장님은 내 끄덕임과 동시에 능숙하게 가격택과 비닐을 뜯어주셨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 편의점 밖을 빠져나와 우산을 펼쳐 쓴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집안 현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런 상황마다 긴급하게 구매했 우산들의 개수를 세어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휴대용 우산 좀 들고 다닐걸!'

그래도 비 맞고 갈 수는 없으니까. 내 머리카락은 소중하니까. 요즘 머리가 너무 많이 빠지니까. 등의 이유를 머릿속에 나열하며 우산을 긴급하게 소비한 나의 판단에 합리성을 더해갔다.


출근할 땐 버스를 타지만 퇴근할 땐 운동 겸 걸어가는 편이다. 약 3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라 적당하고 만원 버스와 꽉 막힌 도로를 경험하지 않을 수 있을 수 있기에 꽤나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5분쯤 걸었을까. 한참을 내릴 것처럼 세차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맥없이 그쳐버렸다. 길거리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우산을 접어 손에 쥐었다.

'하... 그럼 그렇지.'

허탈감을 느끼며 내 머리 위에 펼쳐져있던 새로 산 흰 우산을 접었다.


잘못된 판단을 한 내게 살짝 짜증이 났다.



생각해보면 일상 속에서도 비슷한 상황에 자주 직면한다.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동료와의 회의에 대비해 내 의견을 피력하기 위한 많은 양의 근거 자료를 준비하고, '난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유난스레 공들여 뾰족하게 아이라인을 그렸는데 너무나도 평화로운 분위기로 회의가 진행되던 경험. 길거리에서 인상이 사나워 보이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길래 방어적으로 반응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떨어뜨린 지갑을 주워 건네주었던 상황 등. 내 판단 하에 방어태세를 갖추었으나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상황 속에서 민망해지는 순간들 말이다.


어떠한 조짐으로 피해볼 것을 예상해 한껏 방어기제와 심한 경우 공격 태세까지 갖추었는데 의외로 시시하게 종료되거나, 내 예측과 다르게 평화로운 방향으로 흐르던 일들을 겪을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힘들게 받아들였던 상황들이 자연스럽게 종료되기도 했고 생각보다 덜 고통스럽게 다가오기도 했다.


반복되는 비슷한 상황들 속에서 예상에 기반한 판단을 스스로 내리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판단이 늘 옳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으려 한다.


우산을 사자마자 비가 그쳐버리더라도 유하게 웃어넘기는 여유를 가져야겠다. 하늘의 마음을 읽어내진 못했지만 언젠가 그 우산을 활용하게 될 날이 올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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