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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Sep 21. 2021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대신 '이래도 꺅 저래도 꺅'

행복 남발하기

내 인생은 고난과 위기의 연속이라는 생각에 깊게 몰입해 있던 시기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이 살짝 보여도 어두운 것에만 심취한 채 그 빛을 무시해버렸다. 어두운 것이 사라져야만 빛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친구 L을 만났다. L은 특유의 해맑음을 여전히 잘 유지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철없 밝음에 성숙함이 더해져 살짝 무게감이 생긴 듯했으나 여전 밝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L과 나는 손바닥을 맞대며 짝짝 소리를 내 반가움을 표현한 뒤 라테 2잔을 주문했다.

"라테는 맛있긴 한데, 배가 너무 아파." 라며 마셨을 때의 기쁨보다 고통에 집중하던 나와 달리, L은 우유와 에스프레소의 조합에 따른 고소한 아름다움에 집중하며 "여기 라테 너무 고소하다. 행복해!" 라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당시 내 기준에 L의 행복은 지나치게 남발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늘 행복해 보이는 L의 웃음소리에 살짝 질투가 나기도 했다.  


그날따라 나는 유난히 L이 자주 쓰는 단어와 문장에 집중하게 되었는데, 그녀의 해맑음이 단순히 우리가 겪은 상황 차이 아니라는 사실적 결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새로운 직장으로 이직하게 되었다는 나의 소식에 L양은 "꺅! 대박, 대박! 너무 좋아! 정말 대단해!" 라며 물개 박수를 치며 좋아해 줬다.

나는 L의 격한 칭찬에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커피를 한 모금 꿀꺽 삼킨 뒤 초치는 말을 내뱉어버렸다. 이직할 회사의 분위기가 내 성향과 맞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고, 이 전 회사보다 규모가 작아 체계가 없을 것 같다 등. 아직 겪어보지 않은 상황에 대한 상상 속 고민들을.


L은 특유의 밝은 웃음으로 "더 많은 기회를 받아 볼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그 근처에 예쁜 카페 엄청 많다고!" 라며 내 머릿속에 가득 찬 잡다한 고민들을 가볍고 시원하게 뻥 차 줬다.


연이어 행복해 보이기만 하던 L이 그동안 겪었던 이야기를 들으며 경악했다. 고약한 상사에게 시달려 상처를 받기도 했고, 그녀의 선한 마음을 이용한 누군가에 의해 현금을 날리기도 했단다. 그 와중에 육체적으로 크게 아프기도 했었다고. L이 겪은 상황들은 나라면, 아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크게 자책하고 풀죽어있기에 충분한 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은 그 상황 속에서 느낀 상처들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본인의 감정에 솔직했고, 상처를 곱씹기보단 그 경험으로 인해 얻어낸 가치들에 집중하며 유쾌하게 풀어냈다. 어느 순간 심각한 표정으로 상황 속에 몰입하고 있던 나조차 함께 깔깔 거리며 웃고 있었다.



힘든 상황 속을 헤쳐나가면서도 동화 속을 사는 것 같던 L과 다큐를 사는 것 같던 나의 차이는 단순히 타고난 성향 탓이었을까.


허리까지 기른 긴 머리카락을 드라이기로 말리는 것에 지쳐 단발로 싹둑 잘라버린 금세 싫증을 내는 나. 회사를 다닐 땐 부품이 되어버린 듯한 답답함에 탈출을 갈망하지만 막상 회사를 박차고 나온 뒤에는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제대로 쉬지 못하던 나.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느라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던 그 순간들이 떠올랐다.

L 또한 나처럼 긴 머리와 단발머리 사이를 고민하며 증 내기도 하고, 일과 쉼 사이에서 고민을 했지만 꺅꺅 대며 긴 머리와 단발머리 만의 매력을 찾아내며 즐겼고, 확실히 일하고 세상 누구보다 기나게 쉼을 누리며 행복해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할 바에 고민들은 살짝 접어 두고 내적 '꺅' 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는 요즘. 다큐 같았던 내 삶이 동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드라마 쪽에는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다. 가끔 심각한 상황에 처해질 때면 황당한 상상을 하며 맘 속으로 혼자 꾹꾹 웃어보기도 하는 여유까지 생겨버렸다. 내공이 쌓인 탓인지 내적 꺅 소리를 내려고 노력한 결과물인진 잘 모르겠지만.


대책 없이 무작정 긍정적이기만 한 태도를 지향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은 작은 것들에 행복을 가볍게 남발해보기도 해 보련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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