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a Jan 11. 2022

자줏빛 모자

나의 할머니

퇴근길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멍하니 서 있는데 내 앞에 자주색 모자가 보였다. 모직으로 제작된 겨울용 자주색 모자였다. 고급스러운 꽃무늬 장식도 곱게 달려 있었다. 마음이 먹먹하다. 할머니가 떠난 지 8개월이 지난 지금. 그녀가 쓰던 비슷한 모자만 봐도 코 끝이 찡해오고, 내게 자주 하던 애정 어린 잔소리들과 비슷한 대사들이 드라마에서 들려오기만 해도 울음 터곤 했다. 최근에는 드라마 <인간실격>에서 펑펑 우는 딸 부정(전도연)에게 아버지인 창숙(박인환)이 건넨 다독임 중 "울지 마, 울면 기운 없어"라는 대사가 그녀가 언젠가 내게 건넸던 위로와 똑같았기에 드라마 속 부정처럼 엉엉 울기도 했고, 복통이 심해 누워있을 때 남편이 장난스레 건넨 "안나 배는 똥배~OO이 손은 약손"의 흥얼거림에 배가 너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또 한 번 눈물을 한 바가지 흘리곤 했다.


할머니의 의사 표현 확실했다. 취향이 까다로웠던 할머니는 내가 사준 패션 아이템들이 마음에 안 들면 '손녀가 사줘서 억지로 하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에 쏙 들어 몇 년째 애지중지하던 패션 아이템이 있었으니 바로 자줏빛 모자였다. 백화점 판매 직원분에게 "80대 할머님들에게 인기 많은 모자 추천해주세요."라고 하자 가장 많이 판매되는 제품이라고 추천받았던 모자. 할머니는 곱고 예쁘다며 겨울 내내 그 모자를 쓰고 다녔다. 길에서 만나는 이름 모 들이 "어르신, 모자가 너무 고와요."라며 칭찬을 건네면 "우리 손녀딸이 사줬어요. 우리 손녀딸이 멋쟁이라서 이런 것도 잘 골라줘요"라며 기가 막히게 연결고리를 찾아 내 손녀 자랑을 얹어내곤 했다.


자주색 모자를 사드린 다음 해 주황색 모자를 사드렸으나 할머니는 여러 모자 중 그 자주색 모자를 주로 착용했다. 동글동글 모직 재질이었고 겉면은 손뜨개질한 듯한 니트 재질로 디자인되어있었으며 앙증맞은 꽃이 두 송이 달려있는 그런 모자였다. 평생 기운 좋을 것 같던 할머니는 항암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말라갔다. 자기 전 스트레칭을 꼭 해줘야 한다며 누워서라도 손발을 열심히 꼼지락 거리던 할머니는 숨조차 쉬기 힘들어했고 호스피스 병동에서 점차 의식을 잃어갔다. 그런 그녀를 받아들이는 것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8개월 전이었던 봄.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난 뒤 그저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다. 몇 달 뒤 할아버지 (두 분은 사돈 관계다)까지 떠나보낸 뒤 아픈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새로운 직장으로 이직해 슬픔 따위는 느끼면 안 될 것처럼 열심히 업무를 익혔고, 일했다. 주말이면 밀린 집안일을 하고 운동을 배우고 영어 공부 등을 했다. 생각날 틈을 외면하기 위해 계속 뭔갈 했다. 감정을 죽이고 그리움을 외면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주색 모자가 자주 떠올랐다. 그 모자를 쓴 곱던 미소도. 고운 걸 좋아하던 할머니는 가끔씩 꿈에 나와 노란색 예쁜 구두를 신고 있기도 했고 슬퍼할 나를 달래주 듯 늘 미소 지어주었다.


세상 풍파에 지쳐 어느 때보다 거칠어져 버린 내 모습을 보며, 늘 곱다. 넌 고운 사람이다. 라며 곱디 고운 도자기를 다루 듯 매끈하고 깨끗하게 어루만져주던 할머니 손의 촉감과 온기가 유독 그리운 하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