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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Jul 20. 2021

할아버지의 내일은 어땠을까

2021.7.16

지난주 금요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자전거를 타시다가 넘어져 상처가 났다는 소식을 듣곤 "정정하셔서 100세도 넘기시겠어" 라며 걱정 담긴 푸념을 내뱉곤 했기에 당황스러웠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할아버지가 사시던 곳이자 아빠의 고향인 충북 증평에 도착했다. 무더운 날씨에 금세 어질 해져 음료를 한 잔 사 마셨다. 할아버지는 취미로 일구는 밭에 아침 일찍 나가셨다가 쓰러지셨다고 한다. 30도를 훌쩍 넘는 요즘 날씨에 나 같이 젊은 사람도 버티기 어려운데 고령의 할아버지는 오죽하셨을까.


향년 97세. 당시 시대 상황상 출생신고를 1~2년 늦게 하셨다고 하니 거의 100세에 가까운 나이라 볼 수 있겠다. 할아버지는 매일같이 고추, 두릅, 파, 고구마를 심고 가꾸곤 하셨다. 봄이면 할아버지가 주신 두릅나물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먹곤 했다. 이번 해에는 마당에 나무 한그루도 심으셨다고.


영정사진 속 할아버지는 최근의 내가 본 할아버지의 순하디 순해진 인상과 다르게 날카로웠다. 약 20년 전 촬영해둔 영정사진이었기 때문이다. 늘 할아버지 집 벽면 한편에 걸려있던 그 사진. 어릴 적엔 할아버지가 괜히 무서웠다. 단 한 번도 야단을 친 적도 없었는데 무뚝뚝한 성향의 할아버지에게 다가가는 것이 어려웠다. 명절에 한두 번 밖에 보지 못하던 거리감 또한 컸으리라. 할아버지는 만날 때마다 용돈이나 건식 거리들을 손에 쥐어주거나,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라탈 때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열심히 흔들어 주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하셨다.


할아버지는 세 차례의 암수술을 이겨냈다. 끔찍한 후두암 수술을 겪은 뒤엔 목소리를 잃었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성인이 되고 대학생활과 회사생활을 하기도 했고 결혼도 했다. 목소리를 잃은 그는 항상 메모지와 펜을 챙겨 다녔고 외출을 할 때면 현관문 옆 걸어 둔 화이트보드에 '밭에 감', 'oo리에 감' 등 본인의 행선지를 적어두셨다.


성인이 된 뒤에는 어릴 적 무섭게 느껴지던 할아버지가 귀여워 보였다. 서른 넘은 손녀를 볼 때마다 여전히 어린애인 것 마냥 용돈을 손에 쥐어주셨고, 구석에서 자주 꾸벅꾸벅 졸고 계셨다.


할아버지의 시간들은 대부분 홀로 밭을 일구거나, 마당의 식물들을 가꾸고, 가족들의 묘지에 방문해 그곳의 잡초들을 정리하고 두릅을 심는 것이라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고령의 나이에도 부지런함을 잃지 않는 모습에 감탄하기만 했을 뿐 강인해 보이는 주름 속 숨겨진 고독과 슬픔까지 깊게 헤아리진 못했다. 평생을 함께 한 아내, 가까운 곳에 살며 자주 티격태격하던 큰아들과 형제들을 먼저 떠내 보내던 날 흘리던 눈물과 떨리던 주름진 손이 기억 속에 선명하다.




무더운 더위 속에서 장례를 치른 뒤 잠시 들른 할아버지의 집은 글처럼 평온했다. 평생을 영광스러워하시던 6.25 참전 용사답게 '국가 유공자의 집' 명패가 용맹하게 걸려있었고 여러 개의 태극기들도 곳곳에 달려있었다. 마당에 심어둔 고추들이 싱싱하게 자라 있었고 화이트보드에는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방문한 장소가 적혀있었다.


방안 곳곳에는 가족들의 사진들이 걸려있었고 그 속에는 내 모습도 보였다. 벽면 한 곳 흰 봉투에 까만 볼펜으로 휘적휘적 쓴 글귀가 적힌 흰 종이 조각이 걸려있었다. 약간 삐뚤빼뚤했지만 정성껏 가위로 자른 듯한 흔적이 보였다.


'할아버지, 아프지 마시고 항상 건강하세요.'


2년 전 할아버지가 마지막 암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에 방문했을 때 급하게 5만 원짜리 2장을 담아 드렸던 흰색 봉투의 일부였다. 그 봉투를 건네던 날 할아버지는 아이처럼 수줍게 웃으며 뭘 이럴걸 주냐는 듯 손사래를 치시다가 결국 그것을 가방 속에 소중히 넣으셨다.


수술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 내가 드린 흰 봉투를 꺼내 조심스레 글귀 부분만 가위로 자르셨을 모습이 그려졌다. 더 예쁜 카드에 적어 드릴걸. 사랑한다는 문구도 부끄러워하지 말고 같이 적을걸.




할아버지가 없는 집구석 구석을 바라보며 그가 수 없이 떠올렸을 내일들을 생각해보았다. 마른 몸을 끊임없이 움직이던 부지런함은 사실 많은 그리움과 다가올 이별에 대한 두려움들을 덜어내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매일처럼 푸른 밭에 나서던 아침. 할아버지는 그 길 마지막이 될 것이란 걸 아셨을까.


할아버지가 심어둔 두릅들이 유독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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