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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근요정 Mar 24. 2024

간판도 없고, 소주도 없습니다만

이 작은 동네에 숨어 있는, 그래서 더 좋은 공간

"바로 옆에 국밥집이 진짜 맛있는데, 소주는 거기서 먹는 게 진짜 최고예요. 완전 강추"


 순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소주 한 병 시켰을 뿐인데 갑자기 옆 가게를 추천하다니. 이 젊은 사장님은 장사가 하기 싫은 걸까? 아니면 대뜸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속에서 쓰게 올라오는 반골의 기질을 다스리고 있을 때, 악의 없이 해맑은 표정을 마주하니 자연스레 헛웃음이 나온다.


아, 저건 그냥 진심으로 '소주는 어디서 먹는 게 제일 맛있는지' 추천하는 거구나.

진짜 희한한 술집이네.




간판 없는 가게

 매일 수백 번은 마주한 풍경을 여전히 눈에 담다가 '어, 여기 이런 가게가 있었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평소와 같은 퇴근길. 이제는 익숙한 피곤을 짊어지고 터벅터벅 동네 어귀를 거닐 때, 불현듯 신기루처럼 나타난 공간과 마주치는 날. 이런 작은 일상의 어긋남은 어릴 적 보물 찾기처럼 가라앉은 마음을 수면 위로 둥실둥실 떠오르게 만든다.


큰길 한복판에서 스치듯 지나다녔던, 간판 없는 가게


 처음엔 가게인 줄도 몰랐다. 이 작은 동네의 유일한 대로변에, 저렇게 간판도 없이 홀연히 나타난 곳이 술집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다들 나처럼 그저 '작은 공방이 생겼거니'하며 지친 발걸음을 바삐 놀리고 있었겠지.


 남들은 알지 못하지만 나는 알게 되었다는 알량한 우월감 때문인지. 아니면 꼭꼭 숨어버린 탓에 아직 주목받지 못한 신입에게 가진 연민이었는지. 평소에는 쉬이 떨어질 발걸음이 오늘따라 저 작은 공간을 품고 쉴 새 없이 근처만 맴돌고 있었다. 그래. 오늘은 길을 잃은 척, 우연히 맞닥뜨린 비밀의 문을 두드려보자.


내부는 우연히 일본 현지에서 한국식 포장마차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


소주 없는 술집

 매장에 들어가고 나서야 여기가 일본식 선술집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오래된 카세트테이프까지 진열되어 있어서 영락없이 포장마차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실체를 알고 바라보니, 더할 나위 없는 일본식 선술집이 되었다.


 아뿔싸. 그런데 아무리 일본식이라고 해도 그렇지, 술집에 소주가 없다니? 사장님은 사케와 가장 잘 어울리는 메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소주랑 같이 먹는 것보다 사케가 훨씬 맛있을 거라며, 메뉴와 어울리는 사케를 소개해준다. 덧붙여 만약 자주 지나다니는 길이라면, 소주랑 진짜 잘 어울리는 집을 많이 안다며 추천해주기까지 한다. 경쟁사를 추천해 주는 자영업자라니..? 사장님이 아니라, 후배에게 근처 맛집을 소개해주는 회사 선배를 만난 느낌이다.


방문한 날의 '오늘의 메뉴'는 고슬고슬한 영양솥밥. 이것저것 참 많이도 들어가 있었다.


 선술집에서 예전에 참석했던 와인 클래스와 비슷한 감상을 받았다. 평소 몇 만 원부터 몇 십만 원까지 책정된 와인의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고가의 와인일수록 맛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스토리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딱 한 번 참석했을 뿐이지만 더없이 강렬했던 경험이어서 언젠가 다시 마주할 날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비록 전문 소믈리에의 그것은 아니지만 이곳의 사케는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화자 또한 사케가 품고 있던 이야기를 고스란히 들려줄 뿐, 와인처럼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지 않아 담백한 모습의 일본을 천천히 그려낸다. 낮은 조도와 협소한 공간. 쏟아지는 음악. 향긋한 술과 정갈한 일식. 이 모든 조각이 어우러져 가장 완벽한 지금을 쌓아 올린다.


메뉴로 주문했던 오뎅 모듬과 야끼소바. 간장에 졸인 오뎅이 너무 너무 맛있었다.
메뉴를 찍어도 되냐고 물어보니, 후다닥 가져와서 자세히 설명해 준다.


 술을 먹는 이유야 제각각이겠지만 사람이 좋아서 먹는 날도, 단지 술이 고파서 먹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간판 하나 없는 작은 선술집에서 맞이한 밤은, 어쩌면 술집이 아니라 오래된 친구의 집에서 만난 밤일지도 모르겠다. 내게 쌓인 앙금을 입으로 뱉어내는 곳. 그리고 홀로 격리가 필요한 날 백색소음으로 채워주는 곳. 따뜻한 음식과 알코올이 아닌 향긋한 술. 이 모든 것은 내게 익숙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감정이니까.


나는 화려한 스팸후라이보다, 노릇노릇하게 구워낸 옛날 소시지가 더 좋더라.


 종종 낯선 공간이 어려운 사람을 마주한다면, 나만 알고 있는 '숨은 집'을 넌지시 소개해주자. 홍보보다 본질에 집중하며, 신규 고객보다 기존의 고객을 더욱 중요시하는 곳. 반복되는 일상에서 짧은 일탈을 자아내는 곳. 새로움을 앞세우지 않는 곳. 그런 곳에서 의지하는 사람과 마주한다면 깊은 관계가 더욱 넓어질지도 모르니.


자기가 요즘 연습했다며, 자신만만하게 '사케 타워'를 시연했다. 처참하게 실패했지만.



* 광고/협찬 아님.

* 사진 촬영 및 게재 허락받음.

* 1호선 금천구청 - 오늘의 디스크 조각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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