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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솔 Jan 30. 2021

비평에 대한 작은 생각

작품의 아름다움에 걸맞은 아름다운 글을 위하여

"비평이란 무엇인가?"



훌륭한 비평을 써내기 위하여 수많은 책들(영화보기와 영화 읽기/영화 분석 입문/영화예술 등)을 품에 넣고 다 읽어내고자 끙끙거렸던 날들이 있다. 비평이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고민하기 전부터 필자는 훌륭한 비평에는 '답'이 있는 줄로 알았다. 어떤 공식과 틀이 정해져 있다고 믿은 채로 책을 뒤적거리며 답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답을 위한 여정은 금세 방향을 잃었다.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영화비평에 빠져들었건만, 영화를 감상하는 일이 딱딱한 공부가 되어버렸다. 내가 간과한 것은- 영화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즐기고 느끼는 방식과 그 결과는 자유롭다. 감상의 자유마저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무엇을 오롯한 각자의 것으로 둘 수 있을까. 한동안 영화를 분석적으로 바라보던 나는 한동안 영화를 멀리하였다. 작년, 그러니까 2019년은 영화와 사랑에 빠진 해였고-권태기에 빠진 해이기도 했다. 대학교에서의 2번째 학기가 시작된 후 나는 영화와 거리를 두고, 눈을 감았다. 영화를 열망하는 마음은 식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조커>(Joker, 2019)를 마주했다. 이때 나는 많은 책들이 떠들어댔던 '비평법'을 잊은 채였다. 조커는 내게 눈을 맞춰왔고 나의 심장에 절규했다. 머리로 분석하는 버릇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지만, 나는 그 감정의 주무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어느새 영화가 끝나고,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영화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들이 넘쳐흘렀고, 입을 움찔거리게 했다. 급기야 같이 영화를 감상한 동생에게 나의 '느낌'과 '분석'을 쏟아내다가 입씨름으로 번지기도 했다.     


조커(2019)

 


요컨대 머리로 예술을 '분석'할 수는 있다. 그러나 머리만으로 예술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성과 감성의 오묘한 줄다리기- 나는 그 틈에서 예술을 나만의 방식으로 즐기기로 하였다. 예술에는 답이 없다. 정해진 감상도 없다. 작품을 바탕으로 나만의 그림을 그려내는 것, 그래서 비평은 '예술에서 파생되는 또 하나의 예술'이다.  



어느 교수님께서 비평에 대한 나의 물음에  이렇게 답하셨다.

"비평 쓰기를 배우기 위해 다른 책을 참고하거나 한 적은 없어요. 그저 제 기준에서 아름다운 작품에 합당한 아름다운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합니다."

어떤 비평 지침의 수많은 말들보다 울림을 준 이 말은 아직까지도 가슴에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작품의 아름다움에 충실하게 빠져들어, 이성과 감성과 그 밖의 모든 것으로 예술을 즐기고, 그 아름다움에 합당한 글을, 그 에너지와 힘에 합당한 글을 써 내려가기로 다짐했다. 나의 가슴을 툭- 건드는 예술에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취해볼 필요도 있는 것이다. 작품이 내게 부리는 어리광이며 온갖 투정을, 머리로 재단하지 말고 가슴으로 품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정연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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