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을 벗고 본 세상에서 출발한, 존재에 대한 짧은 사유
아는 대로 vs. 보이는 대로
인상주의에 관한 책을 읽은 뒤부터 가끔씩은 안경을 벗어던지고 세상을 본다. 19세기 초 프랑스 미술계를 뒤흔든 ‘인상주의’는 대상을 ‘보이는 대로’ 그리려는 반고전주의적 시도 속에 확립되었음을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한편 누군가는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게 왜 반고전주의인지 궁금할 수 있으니 간략히 짚고 넘어가자. 고전주의 작품, 예컨대 푸생의 <세월이라는 음악의 춤>을 보면 그 묘사의 사실성을 몽땅 부정하기 어려운 것도 맞다.
그러나 고전주의적 시각은 ‘원근법’과 ‘비례’, ‘균형’, ‘대칭’을 포함한 엄격한 규칙들이 내면화된 시각이다. 고전주의 회화에서 강조되는 ‘윤곽선’은 보이는 대로가 아닌, 관습에 따른 산물이다. 철저히 그 대상에 대하여 ‘아는 대로’, 그러니까 아주 철저한 관례에 따라 그려진 회화는 그 자체로 자연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가 위의 작품에서 높은 수준의 사실성을 감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회화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고전주의적 관습에 익숙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꼭 그림을 그릴 때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볼 때도 ‘아는 대로’ 보는 것에 익숙하다. 내가 안경을 벗고 현관 앞에 놓인 손소독제 스프레이를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이미 손소독제임을 알았기에 그것의 형상임을 지각할 수 있었다. 그것이 손소독제라는 사전 경험이 없었더라면, 그저 하얀색과 푸른색이 조합된 길쭉한 형체로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고도 근시인 내 눈으로는 윤곽선이 또렷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원시적인(안경을 벗은) 눈에서 사물 간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본질이란 무엇인가
어느 날은 책을 읽다가 안경을 벗어보았다. 그 순간부터 책은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다. 정확히는 내가 무슨 말도 읽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내 눈앞에는 그저 하얀 종이, 정확히는 색이 바랜 누리끼리한 종이와 검은색의 무언가-작아서 형체가 분명하지 않지만 일정한 간격들로 떨어져 있는, 또 전체를 보면 뭉쳐져서 덩어리를 이루는 것-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책을 책이게끔 하는 것은 내 눈앞에 펼쳐진 이 조악한 형태들이 아니지 않은가? 책은 인쇄된 활자들의 묶음으로- 한 권의 책으로 내 앞에 있긴 하지만, 그것이 ‘그 책’인 이유는 활자들이 전달하는 ‘내용’ 때문이다. 미학에서 문학 작품의 존재를 물을 때, 책 자체(현상)가 아니라 내용이 핵심이라고 보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일 테다.
그렇다면, 본질이란 무엇인가? 책의 사례에 비추어 보면, 내 손에 있는 종이 묶음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인 이유는 그 종이 묶음의 형식이나 형태 때문이 아니다. 그 책을 그 책이게끔 하는 것은 그 내용이다. 여기에서 깨달은 바- 내게 ‘본질’이란,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것”이다.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의 본질을 물을 수 있다. 책상 위에 놓인 ‘핸드크림’의 본질은? 발랐을 때 유분기 또는 수분기를 제공함으로써 건조함을 없애주는 것. 그렇다고 발랐을 때 미끈거리는 식용유가 핸드크림이 될 수는 없다. 그러니 핸드크림을 핸드크림이게 하는 여러 속성들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거울을 거울이게끔 하는 것은? 그 재질과 생김새가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창문으로 비친 내 모습을 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창문이 거울인 것은 아니다. 창문은 건물과 외부를 연결해주는 ‘문’ 중에서도 인간이 드나들 목적은 빠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보면, ‘사물’의 본질은 그 목적과 용도에서 주로 찾아지는 것 같다.
그럼 인간으로 넘어와 보자. 나의 본질, 즉 나를 나이게끔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렵다. 내 통장 잔고가 나의 본질일까? 아니, 통장에 백만 원을 가진 사람이 전부 다 나인 것은 아니다. 나는 얼굴과 몸뚱이가 이러저러하게 생겨 먹은 사람인가? 아니, 그것은 오늘날 복제 기술로 마음만 먹으면 똑같이 본뜰 수 있다. 복제인간들이 전부 다 나인가?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복제된 클론들과 오리지널한 나는 구분이 되는 것 같다(엄밀히 말하면, 나 개인적으로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사물처럼 인간은 제 용도가 각기 정해져 있는가? 운명론자들은 아마 그렇다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나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고, 우리네 인생은 그 길을 따라 흘러간다고. 정말 그런가? 아닌 것 같다.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미 그려진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조차 이미 결정된 운명인가? 건물이 무너지거나 배가 침몰하는 참사는, 운명적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한 참사들은 인간이 어떠한 대응을 했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선박에 적정 중량 이상의 화물을 싣지 않았더라면, 자재비를 절감하기 위해 철근의 수를 줄이지 않았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그러니 우리 삶에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정해진 것은 없다. 우리 삶은 불확실하다.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나를 나이게끔 하는 것은 나의 ‘행위’이다. 본래부터 영웅인 사람은 없다. 타인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영웅적 행위가 그를 영웅으로 만든다. 본질적으로 선한 사람도, 원래부터 악한 사람도 없다. 우리가 ‘선’이라 규정지은 가치에 부합하는 행위를 할 때, 그는 착한 사람이 된다. 물론 타고난 ‘성격’의 차이는 존재한다. 그러나 성격 중 ‘선’이라는 가치에 기여하는 속성이 반드시 절대적으로 선한 행위를 낳는 것은 아니다. (행동의 확률을 높일 수는 있을 것 같다.)
결국, 나의 본질은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말마따나, 우리는 세상에 내던져진 뒤 (그의 표현대로라면 ‘피투’된 뒤) 행위로서 존재한다. 그러니, 우리의 본질은 과거의 행위들과 현재의 행위가 쌓여 만들어지고 있으며, 또한 미래를 향하여 열려 있는 셈이다. 나를 나이게끔 하는 것은 나의 선택에 달렸다. 당신은 이 세상에 어떤 사람으로 존재할 것인가.
-정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