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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솔 Apr 17. 2023

[사진산문] '어떤 나'를 선택한다는 것

실존을 건져내는 카메라와 돌아봄의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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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선택과 집중이라고, 서울대 캠퍼스를 제집처럼 드나들게 된 지 반년이 채 안 됐을 때 들었던 어느 교수의 말이다. 언뜻 보기엔 철 지난 조언이지만, 실상은 납득되지 않는 화풀이였다. 몸살을 심하게 앓아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소규모 강의에 딱 한 번 빠졌었다. 무단결석은 당연 아니었고, 수업 전 교수님께 연락을 취하고 허락까지 받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허락이 무색하게, 그분께선 다음 수업시간 직전에 나를 당신의 연구실로 불러 날 선 말들을 뱉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조언은 아프다는 이유로 미리 허락을 구하고 수업에 빠진 내게 생뚱맞은 말이었다. 알고 보니 내가 수업에 빠졌던 그날에 무단결석한 학우가 하나 있었다나. 아무래도 조언의 번지수가 틀린 것 같다. 


그런데 요즘 그 오배송된 말을 자주 곱씹고 있다. 지금, 나의 선택으로 말미암은 '분산'의 상태를 겪고 있는 탓일까.

copyright: 정연솔


한 몸뚱이로 이리저리, 내가 원하는 곳과 나를 부르는 곳 모두에 가려니 몸은 늘 찌뿌둥하고, 마음은 둔감해진 채다. 모든 말에 섬세히 귀 기울이는 일은 더 힘들어지고, 사진을 찍게 하는 빛나는 순간들을 못 본 체 하기도 한다. 카메라 꺼내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더 정확히 말하면, 사진 찍기 위해 걸음을 멈출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감상에 젖은 채 내게 주어진 오늘을 나만의 색으로 물들일 시간이 사라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카메라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 경험으로부터 얻은 답이다. 가쁘게 몰아치는 하루를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은- 객기를 부리듯 더 자주 멈춰 서서 보는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 속, 셔터를 눌러 작은 선택들을 남긴다. 나중에 메모리카드를 확인하며 시선을 순간적으로 이끌었던 순간들을 다시 대면한다. 셔터를 누른 그때와 달리 지금은 이미 죽어 지나간 순간들, 그럼에도 한 장 사진으로 영원히 남을 순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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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곳에 가는 것과 나를 부르는 곳에 가는 것 모두 나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선택은 인간으로서 '자유'를 발휘하는 일이다(다만 그 자유를 거부할 자유는 없다!). 인간은 매 순간의 선택으로 자신의 삶을 구성해야 한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이런 맥락에서 인간이 선고받은 자유를 논한 것이다. 


모두가 주지하듯, 자유에는 막대한 책임이 따른다. 인간이 선택을 통해 저 하나의 삶은 물론이고 인류 전체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고 말하는 사르트르의 논리는 이렇다. 반드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미리 정해지지 않은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간다. 이때 인간은 구체적 개인으로서, 동시에 보편적 인간으로서 선택을 하는 것이다. 개인은 하나의 선례로서 인류 전체에 영향을 준다('앙가제'한다). "스스로를 선택함으로써 인간을 선택하는 것"이자 "인간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copyright: 정연솔


개인의 선택이 인류 전체에 '앙가제'한다는 지적은 우리 주변에서도 생각보다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이를테면, 누군가 빈 컵을 놓아둔 행위가 저곳을 암묵적 쓰레기장으로 만든 상황. 최초의 빈 컵에 이어 놓인 무수한 컵들이 저곳을 쓰레기장으로서 못 박는다. '절대적 도덕'은 없지만 인간이 만들어가는 도덕은 있다는 실존주의자들의 입장을 고려하면, 인간의 선택이 지니는 무게는 더욱 무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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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선택으로 인해 짊어지는 무게가 유독 버겁다. 욕심을 부린 탓이다. 이것도 저것도 다 할 수 있을 거라는 근자감이 욕심에 불을 붙였다. 언론사 인턴과 학보사 업무를 병행할 수 있으리라는 지나친 낙관이었다. 과한 선택의 업보로, 매일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상암으로 출퇴근하는 루틴과 함께 대학신문 일을 한다. 심지어 대학신문에서 사진부 기자인 나는 개인적 열망으로 다큐멘터리 제작에 뛰어들었다. 그 덕에 체감 업무는 두 배다.


지난 2월, 다큐 제작을 위해 다녀온 대만. 촬영하는 순간엔 잴 수 없는 행복 한가운데 있었으니, 지금의 고됨을 그 값진 순간들을 떠올리며 달래는 수밖에.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세상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더욱 많다는 사실. 최선을 다해도 바로 잡을 수 없는 극한의 한계 상태는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다.


이런 이유로 나의 선택이 초래한 결과를 마냥 묵묵히 받아들일 수 없을 때도 있는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차라리 해결하기를 관둬야 할까, 이럴 땐 내게 내려질 처분을 그저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을까.


copyright: 정연솔


그럼에도,


'만약에'라는 가정문과 함께 내가 선택을 내린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대도, 나의 선택은 변함이 없다. 당장의 고됨에 주저앉고 싶지 않다. 오히려 고됨의 이면이 그 경험이 유독 소중하고 값졌음을 말해준다. 나의 선택과 책임을 인정하며 마주할 때 고됨은 '기꺼이 버틸 수 있는 고통'이 되는 것 같다.


나의 선택은 '어떤 나'를 향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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