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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솔 Feb 14. 2022

생일 축하합니다.

세상에 내던져진 당신에게 건네는 말




생일, 네가 태어난 날.


코흘리개 시절, 소중한 사람의 생일이 다가오면 나는 한 자 한 자 고심하며 편지를 채워 넣고, 그이의 취향을 저격할 만한 선물을 고른 뒤, 약속을 잡고 그이를 만나 직접 손으로 건네곤 했다. 편지에는 익숙함으로 덮여 있었던 그이에 대한 진심을 살포시 얹고, 선물은 그 정체를 잠시 감추기 위해 반짝거리는 포장지로 꽁꽁 싸맸던 때가 있다. 그렇게 준비한 선물 꾸러미를 들고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은 온통 설렘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초대받은 자'였다. 너의 생일을 축하해줄 자격을 가진 사람, 네가 주인공인 파티에서 너를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힘껏 불러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생일'은 굳이 내 생일이 아니더라도 나를 설레게 했다. 




생일, 너와 나의 거리.


생일은 '나와 당신의 관계'가 분명히 도드라지는 날이기도 하다. 당신과 나의 관계가 특별하다면, 오늘이 당신의 생일이라는 사실이 나의 하루를 특별한 날로 만들기에 충분하지만, 당신과 나의 관계가 두텁지 않을 때는 그 소식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 이때 나는 당신의 생일을 축하할 마음이 거의 없다. 그냥,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입장이 뒤바뀌어도 마찬가지일 테다. 365일 중 하루, 나의 것인 것만 같은 그날은 당신에게 그저 평범한 하루일 뿐. 그리하여 내 마음속 '절친'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이가 나의 생일날 아무런 연락이 없으면 괘씸하기까지 할 텐데, 안면만 있고 그저 그런 사이인 누구들의 연락은 기대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의 경중으로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재인식한다.

이처럼 너와 나 사이의 거리를 새삼 느끼곤 하는 '생일 축하'의 개념은 생일 파티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것, 공적인 모임-으로 분명히 드러났으나, 인터넷 쇼핑이 발달하고 카카오톡의 '선물하기' 기능이 확고해지면서 더욱 사적이고 비가시적이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훨씬 쉬워졌다. 그래, '생일 축하'하기 참 쉬워진 세상이다. 그래서 그다지 깊지 않은 인연에게 생일 축하의 문구를 건네곤 한다. 비록 진부하고 상투적인 한두 마디일지라도. 심지어 카카오톡 고 착한 녀석이 친구들의 생일 정보를 친절히 알려주니, 굳이 기억하고 기념하려 애쓰지 않아도 손가락 터치 몇 번이면 축하할 수 있다. 말과 함께 기프티콘을 보내며 마음을 쉽게 전할 수 있는 셈이다. 생일이 되새겨주는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는 인터넷 통신망 안으로 숨어들어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덕분에 생일 축하를 주고받는 범주는 확대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의외의 인물들에게 축하받을 때도 있고. 나는 그럴 때면 평소 전혀 생각치 않았던 '당신과 나' 사이의 얄팍한 추억을 끄집어보고는, 당신을 내 삶 속에 조금은 더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이다.




생일 축하합니다.


나의 탄생을 그 누구보다 축하해주는 이들은 가족-내지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특히, 배 아파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 세상의 모든 어머니께 자식의 생일은 극한의 고통과 낯선 만남으로 뒤엉켰던 날일 것이다. 나를 감싸고 있던 양수와 탯줄이 세상을 만나 부서지고, 내가 조그마한 주먹을 꽈악 쥐며 뱉어댄 그 서러운 울음이 공기를 울리며 나의 존재를 알리던 날. 어머니 당신께는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고통으로 온몸의 장기와 근육이 뒤틀리던 날. 생일은 곧 양자의 고통일지도 모른다.

원치 않아도 세상에 내밀려 태어난 우리는 태어나지 않았다면 알지도 못했을 온갖 번뇌와 고통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그래도 우리, 나름 잘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매 순간 고민과 결정을 반복하고, 그것들이 행동까지 가려면 또 한참이 필요하지만, 나름의 삶을 우리가 꿈꾸는 방향으로 천천히 이끌어간다면. 잘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 사르트르에 따르면 '나'는 '나의 선택'으로 존재하므로, 우리는 우리 삶의 주체로서 아주 무거운 자유를 영위하는 것이다. 그 무거운 자유를 방기하지 않고 꿋꿋이 매일을 살아가는 당신, 한 치 앞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당신, 그 삶의 출발은 축하받아 마땅하다. 사실 우리의 생일 '축하'는- 힘들 테지만 잘 살아보자는 '위로'와 '격려'에 가깝겠다.





화면 속 영원히 타오르는 촛불을 보며 소원을 빌어보라. 나는 당신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으니 당신 자신에게 빌어보라. 당신의 삶은 당신의 선택이 만들어나가는 것이니, 스스로 바라는 바를 되뇌이고 또 되뇌여라. 내가 어느 날 세상에 내던져진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진부한 위로일 뿐이다. 우리, 잘 살아내고 있다고.



-정연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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