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과 인간의 이기성
언젠가 친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너는 진짜 이기적이야."
황당함에 말문이 막혔던 나는 곧 이렇게 되받아쳤다.
"사람은 다 이기적이야.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이지. 솔직히 너도 이기적이잖아."
*이기적 인간
그때 우리는 가벼운 언쟁 정도를 했던 것 같다. 싸웠다기에는 귀여운 정도의 말다툼. 친구가 내게 이기성의 잣대를 들이민 이유는 내가 그녀의 말에 잘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소리'만 잘 들릴 뿐, 그 말에 담긴 '감정'까지 감각하기는 어려우니 말이다.
이기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 있을까. 누구나 자기 살 궁리를 하는 세상에서, 마음 속에 꿈틀대는 이기심을 억누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애초에 우리는 생존을 위하여 남을 짓밟고 이겨먹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살아남은 족속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이타심은 다분히 선택적이다. 우리는 그렇게 무리를 짓고, 선을 긋고 살아왔다.
'사회적 문제'라고 불리는 수많은 상황들이 그 선 때문에 벌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전쟁'도, '혐오'도 선을 사이에 둔 이들 간의 각축전이다. 당신 주위를 둘러보면 당신이 만든, 혹은 당신의 존재 이전부터 존재해온 선들이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친해지려면 뒷담화를 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선을 긋는 행위로 '너와 나'를 함께 묶어내야 한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뒷담화의 대상은 자연스레 선 밖에 놓인다.
*타인의 고통
타인의 고통이 수없이 소비되는 세상이다. 여기에서 타인이란 '선 밖에 놓인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루에도 열 번씩은 확인하는 인터넷 메인 페이지에는 온갖 사건사고들(최근에는 코로나19의 경황)이 펼쳐져 있다. 한 번의 클릭으로 펼쳐진 교통사고와 화재, 코로나로 인한 사망 소식을 무표정하게-때론 찡그리고 탄식하며 바라보지만, 이들은 '내 무리'에 속하지 않으므로 '마음은 아주 찰나의 순간 따끔할 뿐'이다.
나는 스스로 고통 어린 이미지들로부터 둔감해졌음을 절감한다. 타인의 고통, 타인의 죽음을 무심히 바라보는 스스로의 표정을 생각하곤 소름이 돋은 적도 있다. 나는 이미 당신의 고통으로부터 무뎌졌고, 그저 손가락을 움직임으로써 당신의 고통을 치워낼 수 있었다.
햇수로 3년 전- 처절한 이성으로 책상에 앉아 온종일을 버틴 고등학생이었을 무렵, '어떻게 하면 다른 이들의 아픔을 가벼이 여기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답은 찾지 못했다. 하루에도 몇 차례 타인의 아픔이 나를 스쳐갔고, 나의 현실 또한 버거웠기에. '내 아픔이 제일 크다'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으리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절대로 알 수 없고, 그래서 나의 고통이 가장 큰 재난인 것만 같다.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타인의 아픔보다 종이에 손가락을 벤 나의 아픔이 더 큰 것만 같다.
*나만이 아는 나의 고통, 너만이 알았으면 했던 너의 고통
2019년 방영된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 나를 보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서에게서 나를 보았다. 서울의대에 목을 매는 그 모습이 1등에 목매는 나와 닮아 보였다. 나는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시절, 한 선생님께서 입이 닳도록 하신 그 말. "1등이 아니면 다 똑같아." 나는 누구보다 그 말에 동의하는 학생이었고, 누구도 부추기지 않았으나 나 홀로 나를 몰아세웠다. 1등이 아닌 나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악착같이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그리고 나조차 나를 몰아붙이는 속에 타인 '따위' 보일 리 없었다. 친구들의 하소연, 고민들이 별볼일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도 한가하고 어린 고민이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그 고민이 너무도 소모적이고 감정적이라 한심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러한 마음이 친구들에게 조금이라도 안 느껴졌을 리 없다. 그래서 한 친구는 내게 "너는 이기적이야"라고 말한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뱉은 너 또한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나조차도 나를 끊임없이 부정하고 몰아붙인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너의 일상을 경청해주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은 너무도 이기적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나는 나의 고통을 스스로 감내하려 하는데, 왜 너는 내게 별일 아닌 것도 나누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것이 성향의 차이임을, 내가 네게 일상을 나누고 싶은 소중한 사람이었음을 안다. 여전히 나는 나를 무한정 아끼기 보다는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편이고, 여전히 너는 너를 끔찍히도 사랑하며 아껴주는 사람이다. 여전히 나는 나의 고통이 내 것으로 끝나기를, 너의 고통이 부디 나에게 전염되지 않기를 바라는 '이기적 인간'이다.
*도덕적 괴물
<타인의 고통>에서 수전 손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대상이 담긴 사진을 보고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거나, 몸서리치지 않는다거나, 이런 참사나 대량학살을 가져온 전쟁을 없애려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도덕적 괴물의 반응이다. "
손택은 사진에 주목해 논의를 펼쳤지만, 논의는 사진뿐만 아니라 모든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확장된다. 아픔을 호소하는 당신의 '말'에, 누군가의 고통에 주목한 '영화'에, 홀로 광장에 서서 피켓을 든 '1인 시위'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본 적이 드물지 않은가? 여기저기, 수많은 미디어가 실어 나르는 타인의 고통에 우리는 무관심하다. 무관심은 '선 밖의 사람들이 처한 고통을 쉽게 넘기는 것'이다. 타인의 사고 영상이 궁금해서 찾아보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무관심인 것이다.
일상 속에서 타인의 고통이 그저 '잡음'뿐이었을 수도 있겠다. 당신의 고통에 나는 지독히도 무디니 말이다. 나는 여전히 인간이 이기적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손택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도덕적 괴물'인 셈이다.
-정연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