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33년이 걸렸다. 졸업 후 20여 년이 흘러 우연한 기회에 석사과정을 시작하여 내친김에 박사까지 하겠다고 달려온 것이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학위에 집착하게 하였는지 생각해 본다. 현재의 처지를 보면 학위가 딱히 필요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오랫동안 학위에 매달렸는지 궁금해진다. 평소 뭐든 시작하면 끝까지는 가보려는 성격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해 보인다.
나의 대학 생활은 낭만보다는 꿈을 이루기 위한 투쟁과 같은 시간이었다. 원하는 길을 가고 싶다는 욕망에 더하여 힘들게 가르쳐주신 부모님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 드리고 싶은 절박함이 강했다. 능력의 한계로 목표에 이르지 못하고 대학 4학년을 마치며 군대와 대학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여느 드라마처럼 가정 형편상 입대를 선택하게 되었다.
역사는 가정을 전제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때 대학원 입학을 고집했다면 나의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궁금할 때도 있다. 아내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나아져 있을 것이라며 아쉬워한다. 그땐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아니야, 그랬으면 당신을 만나지 못했을 거니까 지금보다 훨씬 더 나빠져 있을 거야, 그때 대학원에 못 가게 된 것이 정말 다행이야.”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대학원에 대한 미련이 있었는지 모교에서 행정대학원 석사과정을 모집하는 공고를 보고 주저 없이 지원을 했다. 그리운 모교에서 다시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교정은 나를 학창 시절 대학생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치열했던 대학 시절과 달리 5학기 석사 과정은 캠퍼스의 생기발랄함과 청순함, 낭만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웃음 가득한 교정도 거닐어보고 학생회관에서 학생들 틈에 끼어 식판에 식사도 하고 중앙도서관으로 오르는 높디높은 계단에 앉아 수많은 별들도 세어 보았다. 학창 시절에는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던 축제에도 참여하였으니 힘들었던 대학 생활을 보상받기에 충분히 즐겁고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다시 대학생이 되었다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고민하면서 훌륭한 멘토를 만나게 되었다. 나이는 동년배이나 배움이 나보다 깊고 대학원 과정도 먼저 마친 직장 상사가 진로에 대한 상담을 해 주었다. 한번 시작한 공부이니 박사까지 해보라고 하면서 전공도 업무와 관계있는 과목으로 바꾸어 보라고 했다. 그때 멘토의 조언대로 전공을 바꾸고 공부를 계속한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너무도 잘한 현명한 선택이었다.
박사과정은 일반대학원이어서 힘들었다. 매주 두 번씩 야간 수업을 받아야 했다. 학계에서 명성이 높고 따뜻하고 자상하신 지도교수님을 만나 많을 걸 배우고 연구하며 성장했다. 업무가 끝나면 간단히 허기만 지우고 먼 거리를 달려가 젊은 학생들과 함께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토론하고 익혔다. 전공이 달라 많은 공부시간이 필요했으나 업무와도 밀접하고 앞으로 하고 싶은 분야이기도 해서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많이 지치고 힘들었지만 항상 즐겁고 행복했다.
수료 후 학위를 받기 위해 논문을 준비하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처음 논문은 주요 관심사인 청소년 문제를 쓰기로 했다. 청소년들이 무의식적으로 시작한 작은 비행이 성인이 되어가면서 중요 범죄자가 되어 가는 과정을 조사 분석하여 그 주요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혀 이를 예방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연구를 하고 싶었다. 2년 넘게 자료를 준비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논문으로 쓰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여 부득이 중단하였다. 그때 실망감은 생각보다 커서 다시 논문을 쓸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 새로운 논제로 논문 준비를 하였으나 이 또한 여의치 않아서 중간에 그만두어야 했다. 다시 도전했다. 세 번째 도전은 범죄피해자 지원 개선 방안으로 논제를 정해 무사히 심사를 통과했다. 논문을 제출하기 위해 교학과를 찾았을 때 직원이 “박사과정 18학기예요?”라며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모습에 뿌듯함과 창피함이 교차하기도 했다.
졸업식 날 학부 교실에서 젊은 대학생들과 함께 학위를 받았다. 박사는 유일하게 혼자였고 나이도 당연히 가장 많았다. 졸업식에는 어머니와 아내, 아들이 함께 해주었다. 학과장님으로부터 학위기를 받는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지도교수님과 기념사진을 찍고 가족들과 교정 여기저기를 거닐었다. 수업을 받으러 다닐 때는 저녁에만 급히 왔다 가곤 해서 미처 보지 못했던 교정의 멋진 풍경도 꼼꼼히 둘러보았다. 남들이 하듯이 어머니에게 학위복을 입혀드리고 사진도 찍어 드렸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없이 나를 꼭 안아주셨다. 30년 전 아들이 대학원을 포기했을 때 무척 아파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의 아픈 상처가 깨끗이 지워지길 간절히 바랐다.
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것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학위를 받아도 특별히 내세우거나 사용할 곳도 없다. 그래도 마무리를 하였다는 후련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국민학교부터 대학원까지의 오랜 학교생활을 이제 졸업한 것이다. 앞으론 학생으로 학교를 다닐 기회는 없을 것이다.
학생이라는 신분은 나로 하여금 꿈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고, 캠퍼스의 낭만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었으며, 배움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었다. 힘들거나 지칠 때, 포기하고 싶거나 주저앉고 싶을 때면 교정을 찾아 꿈 많던 대학 생활을 추억하며 위로받고 새로운 힘을 얻어 다시 달리곤 하였다. 데이트도 교정보다 좋은 곳이 없었고, 회식 장소로도 대학로의 거리보다 더 활기차고 흥겨운 곳을 찾지 못했다. 일생 동안 학교는 배움의 장소로, 위안의 장소로, 충전의 장소로 항상 내 곁에 있었다. 내가 학위를 핑계 삼아 그리도 오랜 세월 동안 학교 근처를 맴돌았던 이유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