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뛰놀던 중학교

by 송재영

까까머리 학생들이 버스를 밀며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전날 온 비로 흙길은 몹시 미끄러웠다. 간신히 언덕 위로 오르자 학생들은 다시 버스에 올랐다. 여기저기 튄 흙탕물로 교복 바지와 신발은 엉망이었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집과 정반대 편에 있어서 스쿨버스를 이용해야만 했고, 위치도 외진 분지에 있다 보니 포장도 안 된 언덕길을 넘어가야만 했다. 비나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학생들의 등굣길은 고난의 행군처럼 힘들었다.


어머니는 자식 욕심이 과하여 1학년 때부터 3학년 학생들과 같이 등교를 시키고 야간 자율학습에 휴일 자율학습까지 받게 하셨다. 버스라도 제대로 운행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학교의 재정이 열악하여 버스가 오래되고 낡아 고장이 자주 나곤 하였다. 그럴 때면 운행하던 버스가 줄어들어 버스가 집 앞까지 오지 않고 팔달로 한 코스만 운행을 하였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5리가 족히 넘는 먼 거리를 걸어가야만 했다. 어머니는 첫차를 태워 보내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나를 깨워 밥 한술을 강제로 먹이고 가방을 대신 들고 나의 손을 잡고 버스 타는 곳까지 달리셨다. 간신히 나를 버스에 올려 보내고 숨을 몰아쉬며 이마의 땀을 훔치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아직도 애잔한 잔상으로 남아 있다.


우리 학교에는 다른 학교에 없는 특이한 제도가 있었다. 매월 시험을 봐서 평균 85점 이상인 학생에게 우등 배지를 주었는데 다음 달에 성적이 떨어지면 반환해야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조금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가 공부를 잘 시킨다고 소문이 나 있던 터라 학부모님들도 별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학교 방침에 따랐던 것 같다. 당시만 하여도 명문고에 몇 명을 합격시키느냐로 학교의 서열이 정해지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 나를 깨우시던 어머니의 한결같은 고음과 하루도 빠짐없이 늦은 시간 버스 정류장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자식을 기다리시던 어머니의 지친 모습은 내가 우등 배지를 꼭 받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깨끗이 세탁하여 반듯이 다린 교복에 배지를 달던 어머니의 모습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아직 어린 중학생 철부지였지만 그래도 남자였나 보다. 한 번은 어머니가 수돗가에서 교복을 빨다가 통곡을 하시는 것이었다. 긴장하여 방에서 들어 보니 나의 교복 상의에서 가수 ‘혜은이’의 사진이 나왔던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잘못 키웠다고 하시면서 공부 잘하라고 애지중지 키웠더니 연예인 사진이나 가지고 다닌다면서 당장이라도 뭔 일이 생겨 잘못된 길로 빠질 것처럼 한탄하시며 화를 내셨다. 어머니의 노기는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후론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을 구하기라도 하면 들키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요즘도 그때의 이야기를 하며 어머니의 약이라도 올리려고 하면 그때 왜 그리 극성이었는지 모르겠다면서 겸연쩍은 표정을 하시곤 한다.


우리 동네에는 다니는 학교는 달랐지만 동급생이 네 명이나 있었다. 그 때문에 그 친구들이나 나나 시험 기간이 되면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면 어머니들은 어느 집 자식의 성적이 더 나은지에 대한 결과로 무척 예민해지셨다. 그래도 오랫동안 함께 사셨던 인연으로 그 시기가 지나면 다시 친한 이웃으로 따뜻한 부모의 마음으로 모든 자식이 다 잘되기를 바라시며 사이좋게 지내셨다. 지금은 뿔뿔이 헤어져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도 하지만 오히려 서로를 비교하지 않고 그리워하며 지내는 게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고교 평준화가 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로부터 조금 해방이 되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간절히 소망했던 명문고를 보내지 못하게 되었다는 허탈함과 서운함이 무척 크셨는지 공부에 대해 더 이상 다그치지 않았다. 덕분에 중 3이라는 힘든 과정을 크게 고생하지 않고 쫓기지 않으면서 친구들과 즐겁고 재밌게 보냈다.


하늘이 도왔는지 어머니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뺑뺑이였지만 결국 어머니가 그리도 원하셨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학교 배정을 받자마자 즉시 교복을 맞춰 입히고 고향집이며 친척집이며 부모님이 아는 집이란 집은 다 데리고 다니시며 고등학교 입학 자랑을 하셨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노력해서 얻은 결과는 아니었지만 그때 처음으로 고생하시는 부모님에게 뭔가 해 드린 것 같은 뿌듯함을 느꼈다. 아직 입학도 하지 않은 학교의 교복을 차려입고 교모를 쓰고 부모님이 가자고 하시는 곳은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따라다니려고 노력했다.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 창문을 통해 내가 다녔던 중학교가 보인다. 밭을 지나 30여 미터도 안 되는 지척의 거리에 중학교가 위치해 있다. 강당과 부속 건물이 새로 들어섰고, 언덕길이 포장이 되어 있는 것 말고는 오랜 세월이 무심하게 옛 교정의 모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다. 야간 학습 쉬는 시간에 별을 보러 올랐던 학교 뒤 언덕도 그대로이고, 운동장 옆으로 언덕 봉우리에 있던 충혼탑도 옛 모습 그대로이다. 날씨가 좋아 창문이라도 열어놓으면 운동장에서 뛰어놀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와 생기발랄한 웃음소리가 나의 학창 시절이나 똑같다. 세월이 흘러 반백의 중년이 된 나만 변한 것 같다.


몇 달 후면 직장 사무실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한다. 20년이 넘게 모교를 바라보며 근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이른 출근길에 모교를 돌아 거닐며 등교를 하는 후배들을 보던 재미, 점심을 마치고 모교 교정에 가서 후배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던 즐거움,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아련한 추억에 빠졌던 순간들, 사계절 변화하는 교정의 모습을 사진처럼 한 컷 한 컷 찍어 가슴에 담을 수 있었던 기회들은 오랫동안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도 운동장 어디선가 뛰놀고 있는 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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