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기도

by 송재영

체련공원이 있는 연못에 연꽃이 가득 피었다. 운동하던 발길을 멈추고 잠시 연꽃의 은은함에 빠져든다. “어! 연꽃이 흰색도 있네.” 곁에 있던 아내도 흰색 연꽃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라며 관심을 보인다. 한껏 예쁘게 핀 연분홍 연꽃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하얀 연꽃만 한참을 바라보았다. 미안한 마음에 눈길을 돌려 연못 가득 피어있는 꽃봉오리를 반가운 눈길로 한 송이 한 송이 어루만져 본다. 꽃술이 보일 듯이 투명한 연꽃잎을 보고 있노라니 아버지의 모습이 피어오른다.


산사에서 하룻밤 묵을 기회가 있었다. 딱히 원해서 간 것은 아니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사찰에서 주는 옷으로 갈아입고 산사를 둘러보았다. 옷만 갈아입었을 뿐인데 걸음걸이며 마음가짐이 다르다. 스님까지는 아니어도 사찰에서 승복을 입은 처지에 행동거지가 조신하고 진중해야 할 것 같았다. 이른 저녁 공양을 마치고 스님의 설법을 들었다. 난생처음 듣는 설법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세상의 이치를 깨우쳐주는 말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산사라는 곳이 종교적인 장소라서 해가 저문 후엔 인적도 드물고 일반인은 특별히 할 일도 없다. 배정받은 숙소에서 이른 잠을 청해 보지만 세속의 찌꺼기로 쉬 잠들지 못한다. 날짐승들이 모두 잠자리에 든 후에야 적막한 침묵을 덮고 지치고 힘든 육신을 산사에 내려놓는다.


사무치는 그리움에 잠에서 깼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아 밖으로 나와 보니 아직 한밤중이다. 부처님 오신 날이 며칠 남지 않아서인지 대적광전 앞마당엔 경지정리를 마친 논길처럼 연등 줄이 가로세로 정연하게 걸려 있다. 달빛에 의지하여 연등 줄을 따라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연꽃 등을 매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다가온다.


아버지는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연등 행사에 참석하였다. 그렇다고 딱히 종교가 불교인 것도 아니었다. 아침 일찍 가족을 데리고 금산사로 향하였다. 연등을 걸 가장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한 마음이었다. 평소엔 어머니가 사 온 신발도 아직 더 신어도 된다면서 굳이 물려오라고 하시던 아버지가 연등만큼은 가장 크고 고운 연꽃 등을 샀다. 부처님 앞에서 정성스레 예를 드리고 연등에 가족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 마당 한가운데에서 까치발을 하며 매달았다. 아버지는 연등 아래 한참을 서 계셨다.


금산사에 가면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큰스님을 뵈러 갔다. 아버지와는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란 육촌 형님이고 나에게는 재종숙이셨다. 큰스님께 인사를 시키고 큰아들이라고 하시며 이런저런 자랑을 많이 하셨다. 어릴 땐 그런 아버지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는 배움도 적고 집안에 내세울 만한 일가친척도 없다는 생각에 훗날 나의 앞길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 그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금산사에 오셨을지 애잔하고 숙연해진다.


아버지가 떠나신 후에도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어머니를 모시고 금산사로 향한다. 아버지가 하시던 일을 그만두면 안 될 것 같은 심정인지도 모른다. 연꽃등을 사서 가족들 이름을 눌러쓰고 대적광전 마당에 까치발을 하며 연등을 매단다. 행사가 끝나면 큰스님을 뵈러 간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지만 큰스님도 반갑게 맞아 주신다. 큰스님과 나의 대화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아버지의 자식 욕심이 남달랐다고 하시며 자식을 정말 사랑하였다는 말씀을 하신다. 큰스님도 항상 나를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키곤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아시는 듯했다.


다섯 시가 되니 스님 한 분이 대적광전에 불을 밝히고 예불을 드리기 시작했다. 아직 잠자는 대지에 스님의 불경 읊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청명한 목탁소리를 벗 삼아 나한전을 지나 오층 석탑에 올라 적멸보궁을 둘러보았다. 능선만 희미하게 보이는 먼 산에 해가 올라올 때까지 한참을 앉아 있었다. 산사 곳곳에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아직도 산사 어디선가 가족을 위해 기도를 올리고 있을 아버지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아침 공양을 드리는데 스님이 하룻밤 지낸 사람들에게 간밤에 적적하지 않았는지 묻는다. 오랜만에 공기 맑고 조용한 곳에서 몸도 마음도 편히 쉴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들 한다. 나는 여기 와서 아버지를 만나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간다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함께 한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했다. 스님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아내가 발길을 재촉한다. 목표치를 걸으려면 아직 멀었으니 빨리 가자고 한다. 불쑥 아내에게 말해 본다. “우리 템플스테이 갈까?” “왜?” “아버지가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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