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송재영


백팩을 메고 신호등을 기다리며 횡단보도에 서 있다. 출판사에 찾아가는 길이다. 간밤에 온 비로 여름임에도 날씨가 선선하여 걷기에 딱 좋은 날이다. 며칠 전부터 이런저런 일로 마음을 잡지 못하고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무기력하고 만사 귀찮고 공허하고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다. 인터넷에 물어보니 우울증 초기라고 한다. 아내는 권태기라고도 하였다. 주위에서도 안 좋아 보인다며 며칠 휴가를 내고 여행이라도 가보라고 한다. 문제는 그런다고 좋아질 것 같지도 않고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다.


퇴근 무렵 급히 딱 하루의 휴가를 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냥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침에 게으름을 피우다 보니 아내가 휴가 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휴가를 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간섭 같아 퉁명스럽게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혼자 있고 싶으니 오늘은 연락도 말고 찾지도 말라고 했다. 출근시간대에 집을 나서니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출고 후에 한 번도 하지 않은 차량 내비게이션 업데이트를 하러 갔다. 오래 걸린다는 말에 그만둘까 하였으나 오늘은 남는 게 시간이라는 생각에 차량을 맡겼다.


전날 문예반 수업을 받으며 교수님에게 견학을 가겠다고 하였었다. 처음 출판사에 가서 장비도 보고 출판 과정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한 권의 책이 출간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과정과 사람들의 노고가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글쓰기에 대한 좋은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나무에 미안하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나의 글로 위로받고 감동받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호기로운 말도 했다. 교수님은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이야 있겠지만,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돌아보며 정리해 볼 수 있고, 사물을 보는 시각이 넓어지니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이제 걸음마를 뗀 아이가 육상에 대해 아는 척을 하는 치기 정도로 여겼을 것 같아 부끄럽다. 책들로 둘러싸인 출판사에서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좋아하는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지친 심신을 위로받는 듯했다.


출판사를 나와 차량을 찾으러 가면서 보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보았다. 말로는 수십 번도 더 만났으나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가 떠올랐다. 전화를 거니 일정이 없다며 사무실로 놀러 오라고 했다. 별생각 없이 들어선 사무실은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순간 나만 휴가 중이고 다른 사람들은 근무시간이라는 사실이 상기되면서 학창 시절 혼자 학교에 가지 않았던 날의 기억이 짜릿한 쾌감으로 살아났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했다. 휴게실에 마주하니 요즘 애들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느니, 아내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드세져서 큰일이라느니,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뭐할지 걱정이라느니, 우리도 곧 할아버지 소리 듣게 생겼다느니 하면서 육십을 바라보는 중년의 애환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남자들의 수다도 여자들의 수다에 못지않다는 걸 알았다. 밥을 먹으러 가자며 뭘 먹을지 서로 물어보는데 약속이나 한 듯이 시래기 국밥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둘 다 나이 먹었다며 한참을 웃었다. 개인 압력솥에 밥을 해서 밥맛만으로도 한 끼 식사는 거뜬히 할 수 있는 식당을 안다고 했다. 압력솥을 열고 밥을 뜨니 모락모락 피어오른 김에 어머니의 가마솥 밥맛이 묻어 나왔다. 정성 가득히 차려진 밥상에 누군가로부터 대접받는 느낌이 들었다. 친구와의 한 끼의 식사로 쌓였던 피로가 씻기는 듯했다.


식사 후에 서둘러 고등학교 동창생 사무실에 갔다. 점심을 같이하려 했으나 약속이 있다면서 오후에 유튜브 촬영을 하니 오라고 했다. 궁금도 하고 친구도 볼 겸 시간 맞춰 갔다. 친구는 18년간 독서모임을 운영하면서 매주 토요일 새벽에 진행되는 독서토론에 한 번도 빠지지 않던 집념의 사나이다. 회원 수도 많아지고 프로그램도 완벽하게 자리를 잡자, 올해 회장직을 후배에 물려주고 유튜브를 통해 책을 소개하는 1인 미디어에 도전 중이라고 하였다. 친구가 읽은 책이 몇천 권은 될 것이고 가장 잘 아는 분야도 독서 분야이니 방송 콘텐츠는 제대로 잡은 것 같았다. 거침없이 두 편을 찍고 커피를 맛있게 내리는 집을 안다면서 가자고 한다. 바쁜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에 주저하자 손을 잡고 앞서 나선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신이 잘살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자기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며 선뜻 자신의 힘들었던 기억을 소환해 냈다. 묵직한 이야기를 마치고 조용히 듣고 있던 나에게 너 정도면 잘살고 있으니 너무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말라고 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았으나 기분은 좋았다. 친구는 내가 힘들거나 방향을 잃을 때마다 위안과 나침판이 되어 주었었다. 평일에 뜬금없이 찾아온 나의 흔들리는 마음을 알고 자신의 마음을 먼저 내보여준 것이다. 잘하고 있으니 너무 서두르지 말고 욕심내지 말고 지금처럼만 하라고 했다. 사무실로 향하는 친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비게이션의 성능도 시험해 볼 겸해서 새로 난 길을 검색해 보았다. 이전에 검색이 되지 않았었는데 바로 검색이 되었다. 검색이 되지 않아도 크게 불편하지 않을 너무도 하찮은 일인데 남들은 없는 거창한 것을 새로 갖게 된 것처럼 기분이 무척 좋아지면서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건 뭐지? 궁금해진다.


하루 종일 뭔가를 찾아 헤매었다. 나이가 들수록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이 많아졌다. 허전함은 공허함으로, 공허함은 쓸쓸함으로, 쓸쓸함은 외로움으로, 외로움은 불안과 초조함으로 나를 더 옥죄어 왔다.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도 모르면서 너무 높고 거창한 것만 찾아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 본다.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내가 찾고 있던 풍요롭고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내가 강의를 받고 있는 회관에 갔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즐거웠다. 멀리서 보이는 아내가 반가웠다. 아침 일로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모습이다. 찾지 말라더니 왜 왔냐며 새침한 표정을 짓는다. “오늘 하루 깨달은 게 많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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