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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재영 Sep 08. 2019

볼 빨간 사나이

                                  

  갑자기 눈앞이 하얘졌다. 얼굴이 화끈거리며 빨갛게 달아올랐다. 현기증까지 일어난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시간의 흐름이 끊긴 것처럼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렸다. 단상에 선 한 남자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한참을 서 있다.


  어릴 적부터 남 앞에만 서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얼굴이 빨개지곤 했다. 평소 이야기를 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가 일어서거나 앞에 나가서 말을 하게 되면 갑자기 볼 빨간 사람이 되어 아무런 말도 못 하게 되는 것이다. 학창 시절이야 굳이 나서지 않으려고 하면 나서지 않아도 되니 크게 불편하거나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발표를 하거나 회식자리에서는 나서서 말을 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면서 이런 현상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동창회 부부모임에 갔을 때의 일이다. 돌아가면서 자기 부부 소개를 하는 시간이 되어 나도 아내와 같이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 아내와 나의 소개를 하여야 하는데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결국 아내가 우리 부부 소개를 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아무리 대인 울렁증이 심하다고 하여도 같이 간 아내에게 너무 미안하였다. 


  어느 날 아내가 수강증을 한 장 주었다. 세월이 흘러도 좋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아내가 처방전을 준비한 것이다. 내 나이에 웅변학원을 보내야 갈 것 같지 않았는지 크리스토퍼 리더십 코스에 등록해 준 것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을 잘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으로 11주 동안 진행이 되었다. 평생 볼 빨간 사나이로 살지 않기 위한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가르치는 대로 열심히 따라 했다. 그곳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같은 어려움을 가지고 왔다는 말을 듣고 나니 창피하거나 실수에 대한 부담이 덜했다. 아내도 나의 볼이 더 이상 빨갛게 되지 않기 바라는 마음이었는지 강의 내용을 캠코더로 녹화도 해주고 모니터링도 해주었다. 마지막 주에는 수강생들의 가족을 초대하여 발표회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에도 다른 사람 앞에 선다는 것에 대한 심적 부담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발표회야 11주를 만나다 보니 익숙해지기도 하고 동병상련의 심정이라서 부담이 덜했으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원래 천성이 되살아나서 볼 빨간 사람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중학생이 되면서 하고 싶은 일 중에 대중 앞에서 멋진 강연을 하는 강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천성적으로 수줍음이 많고 대인 울렁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강사의 꿈은 접어야만 했다. 크리스토퍼 교육을 받으면서 오랫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꿈에 대한 생각이 다시 싹트는 듯했다. 교육이 끝나고 효과가 크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다시 꿈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그 무렵 회사에서 내부강사 모집 공고가 떴다. 꿈을 되살리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라 생각해서 무조건 지원했다. 서울까지 다니며 1차 교육을 받고 강화 교육도 받았다. 카메라 테스트도 받고 강사로 온 아나운서로부터 발성과 제스처 훈련도 받았다. 선발 과정을 거쳐 강사로 선정되고, 인천시청에서 업무 관련 강의 요청이 들어왔으니 원하는 강사는 지원을 하라는 연락이 왔다. 이틀을 꼬박 고민했다. 한 번도 강의를 해 본 적도 없거니와 우리 직원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고 다른 기관 직원을 상대로 한 강의라서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지원을 하고 두 시간의 강의를 마쳤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섭외한 담당자로부터 강의를 잘 들었다는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도망치듯 서둘러 돌아왔던 첫 강의의 기억은 아직도 온전히 나만의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회사 후배들을 상대로 강의도 다니고, 외부 강의도 하고, 대학생들을 상대로 강의도 하는 소중한 기회들을 가질 수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나도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볼이 빨개지지 않았으면 오히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더 이상 볼이 빨개지지는 않는다. 물론 강의를 잘하거나 듣는 사람들을 들었다 놓았다 할 정도로 위트가 있지도 않다. 아직도 남 앞에 서는 게 부담스럽고 말을 할 때 떨리기도 하고 끝난 후에 아쉬움도 남는다. 앞으로도 내 안의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남 앞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이 아닌 열정으로 볼 빨간 사나이가 되는 그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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