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손> 후기

감독 오정민

by 사원

2023년 부국제에서 처음 선보인 영화 <장손>은 2024년 추석 쯤에 극장 개봉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도 계속 봐야지, 라는 생각을 하며 극장 근처도 가지 못 했다. 올해 설 연휴에 넷플릭스에 공개됐다. 역시 명절에는 <장손>을 봐줘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독립영화는 관객수 3만명이 넘었다면 히트작이다. 더구나 <장손> 작년 백상예술대상에서 오정민 감독이 신인감독상까지 받게 한 작품이니 기대가 되었다.


시놉시스만 봤을 때는 두부공장 이야기가 메인인 줄 알았다. 함정이었다. 두부 공장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우당탕탕 가족 이야기!라는 연막 속에 유교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가족'의 의미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가족 영화 답게 시작은 제사고, 남아선호사상이다. 할머니 말녀는 임신 중에도 제사 음식 준비하는 손녀가 덥다고 해도 선풍기나 돌려주더니 손자 성진이 오자마자 호들갑떨며 맞이하고 애 덥다며 에어컨을 틀어준다. 장손인 성진이 맏이가 아니라는 점에서 장녀의 설움이 도드라진다. 할아버지 승필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전형적인 '격정의 시대를 지나온 할아버지'였다. 반공멸공 교육을 뼈에 새기고 섬망으로 빨갱이 타령을 하시는 분이다. 영화 초반의 승필은 섬망 증세보단 특유의 단호한 꼰대적 모습이 돋보인다. 제사 시간과 제향 음식의 전통을 지켜야 하고, 당신이 설립한 두부 공장은 자동화보다는 사람의 손이 닿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태근은 어쩌면 가장 밉상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술 취하면 같은 말만 반복하고 화내고 주정부린다. 그럼에도 술을 또 왜 그렇게 자시는지. 어머니 수희가 정말 안쓰러운 우리네 어머니였다. 그냥 정으로, 자식 봐서 같이 늙어가는 처지였다. 고모 혜숙은 조카인 성진과도 살가운 관계를 유지하고 수더분한 고모라는 감상이 남는다. 제사를 지내고 가족 식사 자리에서 성진이 두부공장을 이어받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하며 갈등을 빚는다. 술에 취한 태근은 언성을 높이고 그 난리통에도 말녀, 혜숙, 수희는 식후에 먹을 과일을 깎고 있다. 지독하게 가부장적인 장면이다. 여기까지가 초반의 이야기다. 아주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가족상. 가부장적인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들을 견뎌내며 어떻게든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할머니와 어머니, 차별받는 장녀와 온 가족의 사랑과 기대(부담)를 동시에 받는 장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영화의 분위기는 말녀의 사망 이후 급변한다. 승필의 치매 증세는 악화되어 혼자 동네를 돌아다니고 자신의 돈이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혜숙으로 태근, 수희와의 갈등이 깊어진다. 미화는 그 분쟁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 모습이지만 장손인 성진은 그러지 못 한다. 성진은 조부모님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장손이니까. 말녀가 한글 공부할 때 곁에서 함께했던 모습도 나오고, 승필이 가족 묘에 데려가는 것 역시 성진 뿐이다. 사라진 혜숙의 돈을 둘러싼 감정의 골은 깊어지고 영화는 성진을 중심으로 가족의 이야기를 한다. 혜숙의 남편이 사고를 당한 경위, 승필의 과거, 승필과 태근. 이토록 가부장적일 수가 없었다. 이미 초반에서도 승필과 말녀가 미화보다 성진을 더 끔찍히 아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주들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제 자식에게 그러지 않았을 리 없다. 승필이 치매 증세로 오락가락하면서도 성진의 손에 쥐여준 통장과 그 통장에 있는 돈의 출처까지 생각이 닿으면 입을 틀어막지 않을 수 없다. 그 후로 이어지는 엔딩 시퀀스까지 압도적이다. 아무런 대사 없이 몇 분동안 이어지는 장면을 보면서 말을 잇지 못한 채 나만 남겨두고 엔딩 크래딧이 올라간다.


극장에서 볼 걸! OTT로 보게 된 영화에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고 생각한다. 극장에서 이 공기를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단순하게 장손이 가업을 잇네 마네 하는 영화가 아니었다. 영화 한 편에 이미 우리나라에서 전통이라는 껍질을 덮어둔 만연한 가부장제와 차별 구조를 보여준다. 아직도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뭐 떨어진다는 어른들은 있고,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어른들이 있다. 장녀가 잘 되는 것보다 아들이 잘 되길 바라시는 분들이다. 그들이 나쁘다는 말을 하고 싶진 않다. 사회 구조라는 게, 어릴 때부터 당연히 주입되다시피 받은 교육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나라의 딸이기 때문에 불쾌함과 분노를 당해낼 수 없다. 미화와 혜숙이 불쌍했다. 내가 감히 동정해도 되나 싶은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시집 와서 고생만 하는 수희가 불쌍했다. 성진에게 집중하여 성진이 겪게 될 부담과 혼란에도 공감이 되겠지만 명절에 친척집 가서 남자 친척에게 차별받은 경험이 있고, 시댁에서 일만 하는 엄마를 본 딸이 느낄 수 있는 슬픔은 다른 곳에 있었다. 여태 본 독립 영화 중 손에 꼽게 강렬했다. 평범하게 늘어놓는 일상적인 이야기가 날카롭게 속을 후볐다. 후기를 쓰기 전까지 마음이 급했다. 변방의 브런치지만 얼른 올려서 한 명이라도 더 명절에 장손을 봐야하는데! 일이 너무 바빠서 늦어졌다. 다가오는 주말, 친척들은 없어도 가족끼리 옹기종기 모여서 <장손> 한 번 얼큰하게 자시는 거 어떨까 제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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