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후기

감독 안국진

by 사원

영화를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포스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늘 봐야지. 하고 마음만 먹고 묵혀둔 영화.

분명 <계시록>을 보려고 했는데 이쪽으로 손이 갔다.

명성에 비해 의외로 독립영화로 구분된다.


무료 심리 상담 센터를 배경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누가 봐도 진상일 것 같은 여성은 의외로 등장씬 외 비중이 전혀 없었다. 주인공인 '수남'은 상담사를 폭행하고 묶어둔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액자식 구성으로 수남의 과거 회상이 시작된다. 자격증 많은 앨리트였던 어린 시절, 컴퓨터에 밀려나서 공장 회계일이나 겨우 구하고, 남편을 만나고, 남편의 청각 장애가 심해져서 거금 2천만원을 들여 인공와우 수술을 하고, 남편에게 또 한 번의 사고가 생기고, 폐인이 된 남편을 위해 집을 사고, 대출을 갚기 위해 하루종일 일만 하던 성실한 수남의 모습을 보여준다. 툇마루에 앉아 수남의 고생한 손을 만지며 눈물을 보인 남편 '규정'은 감명받아 재기를 하는가 했더니 자살시도를 하고 식물인간이 된다. 규정이 병원 신세를 지면서 수남은 집을 세놓고 고시원 생활을 하며 여전히 성실하게 일을 하며 지낸다. 병원비와 대출 빚에 짓눌리던 수남은 집을 팔기로 결심하고 부동산에 찾아갔지만 중개사에게서 재개발 소식을 듣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집이 재개발 지역에 포함되지 않은 동네 주민들은 반발하며 시위에 나섰고, 수남은 재개발을 진행하기 위해 동사무소에서 '방법'이라며 소개시켜준 재개발 찬성 서명을 받기 위해 불철주야 동네를 돌아다닌다.


오프닝에서는 심리상담을 해주는 '경숙'이 착한 사람이고 대뜸 찾아들어와서 이상한 것을 먹이고 칼로 협박하는 수남이 나쁜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액자식으로 구성하여 수남이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지에 대한 사건을 설명해준다. 이제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수남의 죄라면 성실하다는 것 밖에 없었다. 자격증도 성실하게 따고 일도 성실하게 했다. 수남의 행동에는 무엇 하나 악의를 가지고 한 것이 없었다. 다만 성실하게 산 것만큼의 결과가 따라오지 않았고 사람들은 오히려 수남을 우습게 보고 이용하는 것에 가깝다. 두 번째 챕터의 제목은 '님과 함께'다. 의사는 병원비 미납을 운운하며 규정에 대한 존엄사를 제안했지만 수남은 그것을 거절하고 물심양면으로 식물인간 남편을 돌봤다. 그 후로 수남은 재개발을 막는 사람을 살인한다. 재개발은 규정과의 여생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수남은 사랑마저 성실하게 한다. 남편이 완전한 청각 장애인이 되고 손가락도 잘리고 식물인간이 되더라도, 수남은 일편단심 규정만을 위해 살았다. 도철은 명백하게 재개발을 반대하는 사람이었기에 죽었다. 의도적이진 않았지만 빌미 제공은 그런 이유였다. 형석은 수남을 납치 감금하여 남편이 병원에 있다는 호소를 무시하고, 재개발 발표 날 때까지 풀어주지 않겠다고 하다가 죽었다. 경숙은 도철과 같은 시위 주도자였고, 그 다음 살인도 재개발을 막겠다는 협박에 스위치 켜진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목을 그었다. 세 번째 챕터에서는 재개발이 확정되고 보상금을 받은 수남은 밀린 병원비를 수납하고 남편과 못 간 신혼여행을 떠나면서 영화가 막을 내린다. (병원비를 완납하고 퇴원을 결정했을 때 의사는 그제야 '천천히 생각해 보시라'고 말한다. 넌 수남 씨랑 사회에서 만나면 복어킥이다.)


이미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분석한 영화를 뒤늦게 보는 건 꽤 민망한 일이다. <지구를 지켜라!>에서도 느꼈지만 보는 사람 없는 후기라고 할지라도 조금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대표적인 국산 블랙코미디 영화이다. '성실'이라는 평가에 대해서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성실하다.' 단어만 두고 봤을 때는 분명한 칭찬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성실이 빛을 보기엔 어려운 감이 있다. 영화가 개봉하고 10년이 지난 현재는 그 의미가 더욱 퇴색되었다. 투자, 코인, 증여로 부를 쌓아올린 사람들은 끝도 모르고 부자가 된다. 수남은 대출 1억 4천만 끼고 서울에 자가를 구했지만 요즘 시대에는 택도 없다. 성실하게 일해서 번 근로소득은 바보 취급만 당하는 세상이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2015년에 개봉한 영화지만 2026년의 사회를 살아가는 눈으로 봤을 때도 꽤 세련된 현실 비판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경숙은 성실함과 거리가 멀다. 말로 주민들을 선동하고 도철의 죽음 조차 시위 활동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계산적인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숙은 수남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주목 받고 말에 힘이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성실하게 사는 건 바보짓이니 성실하지 맙시다!"라고 말하는 영화는 아니다. 수남이 성실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경숙처럼 자신의 목적인 재개발을 확정짓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서 설득하고 말로 현혹시켰다면? 관객들은 수남에게 설득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수남이 '성실'하게 살아온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수남을 편들어주게 된다. 수남은 성실하게 일하던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로 하여금 살인조차 합리화한다. 이 영화를 보고 "수남은 미친 여자다. 끔찍한 살인마다." 라는 평을 남길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더라도 "수남은 살인마지만, 그럴만 했어." 라는 의견이 더 많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줄여서 혐츠코)이라는 영화가 나란히 붙는다. 둘 중 하나를 봐야한다면 나는 단연 전자를 고를 것이다. 나에게 혐츠코는 마츠코의 잘못된 선택과 불행한 삶을 전시하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치고 괴롭게 만드는 영화였다. 하지만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수남의 불행한 인생을 보면서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영화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어떻게 보면 우리들 인생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자본가의 시선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소시민의 입맛에는 좋았다.


여담이지만 단순히 내용에 대해서만 소감을 남기기엔 아쉬울만큼, 이 영화는 이정현 배우가 아니라면 완성되지 못 했을 것이다. 수남은 웃는 습관이 있다. 자기 변호를 할 때와 상대의 호의에 기대야 할 때 주로 어색하게 웃는다. 미간을 찌푸리고, 눈가에 웃음을 지으며, 으흐흐 하는 웃음 소리를 낸다. 그 표정은 이정현 배우가 아니면 살리지 못 한다. 이정현 배우 특유의 날카로운 무표정과 웃을 때 사랑스러움이 공존하는 페이스는 2026년이 되어서도 마땅히 대체할만한 배우가 떠오르지 않았다. 첫 번째 살인에 대해서는 죽이려고 그런 게 아니라며 겁먹고 호소하던 수남이 점차 대범해지고 경숙의 앞에서는 자신이, 당신이 그렇게 된 사연에 대해서 설명할만큼 태연해진다. 사건의 흐름에 따른 표정 변화도 인상 깊었다.


끝맺음이 애매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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