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아이를 받아들이며
어느 날 아들은 독서실 열람실의 칸막이가 답답하다고, 특유의 정적이 숨이 막힌다고 말했다. 나는 일종의 문화적 충격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아, 이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구나’ 내게는 도서관이 고요함과 정적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공부에 몰입할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인데, 아들에겐 숨이 막히고 답답한 공간이었다.
아들에게 그곳은 고통을 견뎌야 하는 곳이었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노력해 보자고 설득도 해보고 같이 가서 있어 주기도 하고 20~30분씩만 있다가 와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는 점점 힘들어했고 마침내 더 이상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 공부하기 싫어. 내가 여기에 왜 있어야 하는데??
중학생 아이의 공부하기 싫다는 선언에 나는 당혹스러웠다. 학생인데? 공부를 안 하면 뭐 하겠다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게 공부하기 싫고 해야 할 이유를 모르는 아이를 도서관에 데리고 다녔다니. 내 노력과 의지와 모든 기대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어릴 때부터 영리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게 기대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아들은 한글도 셈도 빠르고 뭐든 가르치는 대로 단숨에 습득해 버렸다. 특히나 수학적인 재능이 있었다. 개념을 일부만 가르쳐줘도 다음과 그다음을 혼자 풀어버리곤 했다. 수학이 재밌다고 말하던 그 아이, 혼자서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내며 즐거워하던 아이. 그런 아들이었다.
그저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실망인지 절망인지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어쩌다 보니 국내에서 교육열에 선두를 달리는 곳에 살게 되어 아이를 키우게 되었다. 아무리 경쟁에 목석같다고 자부하며 살아온 나로서도 주변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아이에게 재능이 있으니 욕심이 난 것도 사실이었으리라. 대치동키즈는 아닐지언정 나름의 형편껏 로드맵이라는 틀을 정했고 아이도 그 길을 걸어가 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과 역량이 다르다는 것을 간과했다.
아들은 또래보다 정신적인 발달이 다소 늦었다. 시간 감각이 부족해서 학교나 학원에 제시간에 맞춰 가지 못했다. 준비물을 챙기는 것, 선생님의 말씀을 전해 주는 것, 자기 소지품을 챙기는 것 등의 사소한 일들도 대부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이라면 으레 놓치게 마련이지만, 아들은 달랐다. 언제나 빼먹었고, 늘 챙기지 못했고, 해야 한다는 책임과 의무감도 한참 부족했다. 과제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을 놓쳐 학원 셔틀을 놓치고, 휴대폰, 지갑, 필통, 가방, 점퍼, 신발 등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중학생이라서, 사춘기라서, 남자아이라서 라는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들은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그것도 잠시, 그럼에도 주변에 또래 중학생 남자아이들을 보면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다르다는 것, 내 아들은 다르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애초에 마치 정석처럼 보이는 로드맵을 따라 키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로드맵은 누구에게나 정석은 아니었다. 보편적인 길에서 벗어난 사람도 있다는 것, 어쩌면 사람수만큼이나 다양한 다른 길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시의 결과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대학간판과 능력주의가 핵심가치인 이 사회에서 그 다른 길이란 건 결국 불리함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이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혀 숨 막히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들의 마음을 알아버리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했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꼭 필요한 것들은 계속 노력해야겠지만, 맞지 않는 옷을 강제로 입히는 일은 더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아들의 속도를 기다려 주고 어울리는 길을 찾아 줄 수 있기를,
그러기 위해서 좀 더 지혜로운 엄마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