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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준 Oct 28. 2021

오랜 멍 때림과 짧은 글쓰기

어떤 글은 하루 만에 쓰이기도 하고 어떤 글은 평생에 걸쳐 완성되기도 한다.


글쓰기는 첫 글자를 적을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적어야겠다 결심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일을 겪고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비록 스스로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있었는지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결심이 서는 순간 알게 된다. ‘그때부터였구나. 오래 되었구나. 이제야 준비가 되었구나’ 하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발행한 브런치북 ‘내 작은 도시 속의 세계’는 탈고하는데 10년이 걸린 게으름과 멍 때림의 결정체이다. 10년이면 못해도 장편 소설 한 편이나 마음만 먹으면 대하소설도 집필할 수 있을 만한 시간 아닌가.


고백하건대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있었지만 책을 완성하기 위해 들인 시간은 채 몇 달도 되지 않는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한 글자씩 끼적거리던 것이 하나둘 모여 문장이 되었으나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문장이라 노트북 속에 꽁꽁 숨겨놓았다. 티끌도 1, 2년 넘게 모이다 보니 양이 제법 쌓이기 시작했다.


계기는 별 거 아닌 말 몇 마디였다.

"커피 잘 아시네요. 좋아하시나 봐요."

커피를 좋아하는 건 맞는데, 내가 커피를 잘 알았던가. 집으로 돌아와 홀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다른 누군가에게 커피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닌 적도 없고 커피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인터넷에 검색만 하면 내가 모르는 정보가 넘쳐나고 전문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니까. 주변에 커피에 대해 대화할 사람이 없다 보니 이야기할 사람이라면 카페에 들렀을 때 커피를 내려주는 바리스타 정도였다. 커피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니 그 지식의 깊이가 어디 같을 수 있을까. 그러다 보니 당연스레 말은 줄이고 듣는데 더 집중하게 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게 더 즐거웠던 것도 사실이고.


그러던 어느 날 가까운 지인들과 떠났던 여행에서 카페에 들렀다. 마음 편히 만나는 사이이다 보니 그랬을까. 나도 모르게 커피 이야기에 신이 나서 이 원두는 이렇고 저 원두는 저렇고 하며 떠들어댄 것이다. 다소 의외인 듯하다는 그들의 표정과 별 거 아닐 수 있는 말 몇 마디가 브런치북을 발행하는 결정적 순간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가볍게 등을 밀어주던 그 순간을 맞이하기까지 내 속에선 오랜 고민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켜켜이 쌓여있던 흔적들을 하나둘 치워가면서 그 시작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10년 전 멜버른의 센트럴 플레이스, 커피 향으로 가득하고 활기가 넘치던 그 골목에 다다른다.


9월. 한참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국과 달리 멜버른의 첫인상은 쌀쌀했다. 말마따나 이역만리에 홀로 떨어져 있는데 날까지 추우니 괜스레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해도 탓할 일은 아닐 것이다. 발이 땅에 닿아 있지 않는 듯 붕 떠 있는 기분. 난생처음 이방인으로 구별된 낯선 기분은 자연스레 안식처를 찾아 돌아다니게 만들었다. 그러니 달콤한 커피 향에 이끌려 닿은 곳에 마법 같은 골목길이 펼쳐져 있었다면 한 순간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멜버른에 머무르는 내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그 골목을 찾은 것 같다.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나 야라 강변에 앉아 생각에 잠기고 싶을 때면 가볍게 들러 테이크 아웃을 했고, 브런치의 여유를 즐기고 싶을 때면 골목까지 삐져나온 테이블에 앉아 지나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커피를 음미했다.


조금씩 커피의 맛을 알아가면서 멜버른에 있는 여러 카페들을 방문했다.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멜버른 길목 곳곳에 숨어있는 카페에서 즐겼던 ‘매직’[1] 커피, 멜버른 속 작은 이탈리아라고 불리는 라이곤 스트리트에서 맛 본 에스프레소.

하지만 공교롭게도 나의 처음과 마지막 커피는 모두 센트럴 플레이스, 그 작은 골목에서 이루어졌다. 첫 커피는 이방인의 불안함을 위로해주는 잔이었고, 마지막 커피는 떠나는 자의 아쉬움을 달래주는 잔이었다.


이별이 너무 아름다우면 미련이 남게 되는 건지 그 후유증 덕분에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후에도 커피를 찾아 돌아다니게 되었다. 공부와 취업에 치이고 업무에 적응하며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다 보면 잠시 잊혀질 때도 있었지만 한참을 돌고 돌다 보면 결국 제 자리로 돌아와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을 달래고는 했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에서 “모든 여행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라고 했다. 10년 전 떠나왔던 나의 길은 여기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은 이전보다 조금은 더 선명하게 알 수 있다. 내가 지나온 길이 책이라는 형태로 작은 흔적을 남겨주었으니까.


과거에 지나왔던 어느 길이 미래의 또 어느 길에선가 마주치게 될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그때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을 듯하다.


      


[1] 멜버른의 시그니처 커피로 메뉴판에서 찾을 수는 없지만 멜버니언이라면 누구나 알고 어디서든 주문할 수 있는 커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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