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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준 Aug 09. 2020

굳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이유

수동 카메라를 메고 걸어가는 길

출근과 동시에 이메일을 확인한다. 페이지 겹겹이 쌓여있는 메일을 하나씩 헤쳐나간다. 급해 보이는 작업 메일들만 먼저 골라낸다. 오늘 당장 처리해달라는 번역 건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작업별로 나누어 번역 분야와 일정을 확인하고 번역가를 섭외한다. 수년간 반복하다 보니 몸이 기억하고 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다 보면 오전 시간이 다 흘러간다.
 
점심을 먹고 나면 번역가들에게 작업을 보내고 납품된 메일을 확인한다. 그냥 받고 전달만 하면 편하련만 파일은 제대로 들어있는지 누락된 내용은 없는지 한 번씩은 훑어봐야 한다. 행여 납품할 작업이 시간 내에 안 들어오기라도 하면 비상사태다. 담당 번역가에게 전화, 문자, 카톡, 이메일 가능한 연락은 다 넣어본다. 잠수라도 타서 번역물을 못 받게 되면 부리나케 다른 번역가를 섭외한다. 고객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저녁 늦게라도 작업을 납품하고 나면 녹초가 된 채 퇴근한다. 이런 날이면 나도 모르게 길바닥에 한마디를 토해낸다.
“하… 어째 마음대로 되는 게 없네.”
멀쩡한 속에 먹은 걸 게워 낼 수는 없으니, 말이라도 토해낸다고나 할까. 그나마 이런 긴급한 일이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일상에 별다른 취미가 없는 나에게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는 건 힐링이었다. 낯선 도시를 배회하며 한 장씩 사진을 담아내다 보면 명상을 하듯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지고는 했다. 그런데 더는 힐링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해외로 나가는 것은 물론 국내라 해도 웬만한 여행지는 마음 편히 가기가 어려워졌으니까.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대신 대리 만족한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놓쳤던 여행 관련 프로그램들을 하나씩 훑어봤다.
그러다 JTBC에서 방영했던 '트래블러 아르헨티나' 편이 눈에 들어왔다. 젊은 배우들끼리 여행하는 프로그램인 만큼 액티비티 하나쯤은 시도해보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나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별생각 없이 시청하던 여행 프로그램에서 마음을 흔들어 놓는 한마디를 듣게 될 줄이야.
 
배우 강하늘과 함께 뛰어내린 스카이다이버는 몇십 초의 자유 낙하를 끝내고 낙하산을 펼쳤다. 귓전을 때리던 바람 소리가 살짝 잦아들고, 파란 하늘과 발아래 놓인 풍경이 눈에 들어올 때쯤 창공을 배경으로 그가 말했다. “Welcome to my office(내 사무실에 온 걸 환영해요)”.
할 수만 있다면 바로 비행기표를 끊고 아르헨티나로 날아갔을 터다. 스카이다이빙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 스카이다이버를 만나 보고 싶었다. 인생에 단단히 닻을 내리고 타인이란 파도에도 떠밀려 가지 않을 것 같은 그의 모습에 ‘어떻게 하면 그런 태도로 살아갈 수 있나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불현듯 던져진 삶의 화두에 생각이 깊어졌다.




한동안 고민을 거듭하다 카메라를 새로 장만했다. 여행 불가 시대에 여행을 가는 대신이라고나 할까. 아르헨티나를 여행했다면 몇 주 정도는 먹고 싶은 대로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 꽤나 큰 금액을 지불하고 얻은 건 21세기와는 거리가 먼 수동식 카메라. 휴대폰으로도 버튼만 누르면 작품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최신 디지털카메라 라면 대충 셔터만 눌러도 자동 초점 기능으로 피사체를 놓치지 않고 잡아낼 수 있다. 그런데도 굳이 수동으로 제어해야 하는 카메라를 산 건 아집에 가까웠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 의지만 반영된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아집.
 
그 후로 어디를 가든 거의 매일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자동 촬영에 익숙하다 보니 엉뚱한 곳에 초점을 두기도 하고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흐릿하게 찍기도 했다. 한동안 결과물은 엉망이었다. 짜증이 날 만도 한데 이상하게 충실함이 더 컸다. 구도를 잡고 조리개를 조이고 초점을 맞추며 차츰 사진 속에 나의 시선을 담아냈다. 그렇게 길 위에서 조금씩 나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금도 일을 할 때면 이리 끌려다니고 저리 떠밀려가기도 한다. 나를 두고 멀리멀리 밀려가지만 이제는 돌아오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난 길 위에서 천천히 뷰파인더에 눈을 맞춘다.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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