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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웰컴 투 토끼굴

토끼굴의 물건들은 토끼굴로

by 앨리버

막상 한국에 돌아가기로 결정했으면서도 준비에 이렇다 할 진전은 없고 불안한 마음만 커져가고 있다. 이 시간이 7년 전 중국으로 떠나오기 전과 꼭 같아서 속으로 내심 웃음도 나온다. 달라진 것이라면 그때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 너무 막막해서 손도 못 떼고 있었다면 지금은 이러나저러나 나는 내 길을 가게 될 것이고 결국 잘 해낼 것이라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지난 중국 생활을 통해 얻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금 더욱 손을 놓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중국에서도 잘 살았는데 한국에 돌아가면 뭐 어떻게 안 되겠어?’라는 지금의 생각 대신 7년 전 내 마음속에는 ‘한국에서 살았던 것만큼 중국에서 잘 살 수 있을까?’하는 의심과 걱정이 가득 차있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이사를 준비하면서부터는 내 걱정을 덜어줄 물건들을 참 많이도 사서 쟁였다. ‘혹시 모르니까, 혹시 모르니까’하는 ‘혹시병’에 걸렸던 거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외국 이민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들에 대한 팁을 얻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의 조언도 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가지 물건은 김치 재료 세트와 미용 가위 세트, 그리고 빨래 바구니 세트다. 또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세트가 아닌 낱개는 쳐주지도 않으니까.


한국에서 살 때 김치는 부모님께 얻어먹거나 사 먹곤 했는데, 다들 외국에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으니 김치 담글 재료를 사가야 한다고 했다. 중국에서 김치 담근 썰을 찾아보니 배추는 물론이고 고춧가루나 다른 재료들도 모두 중국에서 구할 수 있지만, 단 한 가지 아쉬운 게 소금이라고 했다. 왜인지 몰라도 중국의 소금은 약간 쓴 맛이 나서, 그 소금에 배추를 절이면 김치에서조차 쓴맛이 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물을 쪽 뺀 신안 천일염을 잔뜩 사고 인터넷을 뒤져 포장이 잘 된 고춧가루와 액젓도 두어 병 사서 비닐에 넣고 꼭꼭 잘 쌌다.


미용 가위 세트는 외국 생활을 오래 한 경험이 있는 친구에게 추천받은 물건이었다. 그 친구는 미국에서 10년 동안 지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미국에서 괜찮은 미용실을 찾기란 하늘에 별 따기이며, 그래서 인터넷 동영상을 보면서 직접 머리를 잘랐다고 했다. 한국에 다니러 온 김에 사갔던 미용 가위 세트를 이용해서 셀프 미용을 했을 때가 가장 만족도가 높았다며 강력 추천을 하기에 한참 동안 인터넷 검색을 해서 가장 대중적인 세트를 구매했다.


그래서 이런 아이템들을 잘 썼느냐 하면, 대답은 ‘아니요’에 수렴한다. 중국엔 한국만큼은 아니어도 그나마 괜찮은 미용실도 제법 있고, 세계로 수출하는 포장 김치 덕분에 김치 구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한식당도 몇 군데 있어서 파김치며 갓김치 같은 다양한 김치를 배달 주문해서 먹을 수도 있었다. 미용 가위 세트는 가끔 미용실 갈 시간이 없을 때 앞머리를 조금씩 자르는데 요긴하게 사용했지만 천일염과 고춧가루는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그나마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음식 배달이 요원했기에 몇 번 김치를 직접 담갔을 뿐, 모든 것이 내 기우였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 기우 중에 기우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빨래 바구니 세트다. 먼저 중국에 와있던 가족은 누차 ‘여기 모든 게 다 있으니 이삿짐은 되도록 줄이고 몸만 오면 된다’고 강조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했다. 내가 인터넷 쇼핑을 통해 사는 물건들도 모두 중국산인 건 잘 알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판매되는 것들은 무언가 다를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혹시 중국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못 찾으면 어떡해, 혹시 내 언어가 부족해서 쇼핑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물건들을 주문했고, 거짓말 보태지 않고 아파트 복도 가득 사람 키만큼 택배 상자가 쌓였다. 그 택배를 뜯어서 이삿짐을 싸는데도 한참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막상 중국에 와서 보니 똑같은 빨래 바구니 세트가 무려 1/3 가격에 팔리고 있는 것이었다. 내 키만큼 쌓였던 택배 상자 속에 들어있던 물건들 대부분이 그랬다. 결국 나는 중국산 물건을 한국에서 세 배나 비싼 가격에 산 다음 또 비싼 국제이사 비용을 들여서 다시 그들의 고향으로 데려온 셈이었다. 맙소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는 토끼를 따라 토끼굴로 뛰어들었다가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고 마는데, 그 굴의 깊이가 지구 반대편에 닿을 듯 깊었다. 토끼굴의 벽면에는 거대한 벽장과 선반이 가득했고 그 안에 지도와 그림이 걸려있었다. 앨리스는 떨어지고 떨어지면서 선반 위에 놓인 물건을 들어 구경하다가 다시 벽장에 돌려놓는다. 마치 내가 고향에 데려온 나의 수많은 세트 아이템들처럼, 토끼굴의 물건들은 토끼굴로, 중국의 물건은 중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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