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적 연구와 현장에서의 열정으로 이어진 ODA 외교
외교관으로서 첫발을 내디디며 처음 마주한 업무는 ODA(공적개발원조), 즉 개발도상국과의 경제협력과 개발협력이었다.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특별함 때문일까. 첫 부서에서 마주했던 일과의 씨름과 그때의 열정은 아직도 생생하고 34년의 긴 여정을 마친 지금도 소중하고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1991년 말, 외무고시 합격 후 외교안보연구원에서 6개월간의 초임 교육을 마치고 처음 배치받은 부서는 외교부 국제경제국의 경제협력2과였다. 당시 국제경제국에는 경제협력1과, 경제협력2과, 자원협력과, 경제기구과, 과학환경과 등 5개 부서가 있었는데, 선진국과의 경제협력을 담당하는 경제협력1과와 달리, 경제협력2과는 개도국과의 협력 업무를 맡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급속한 경제성장 속에서 개도국과의 협력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었고, 북방외교의 성과로 동유럽 국가들과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협력 수요가 늘어나던 시기였다. 특히 그해 4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대외원조 체계가 마련되었고, '경제협력2과'는 그 중심에 있었다.
인사 배치가 있던 날 아침의 광경이 지금도 선명하다. 50명의 동기가 강당에 모여 배치부서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고, 인사과에서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면서 배치되는 부서 이름을 발표할 때마다 희비가 교차했다. ‘동북아1과’가 불리면 선망의 함성이 터졌고, ‘아프리카1과’가 불릴 때는 묘한 숙연함이 감돌았다. 내가 배정된 '경제협력2과'는 제네바에서 돌아온 김종일 과장님을 필두로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포진해 있었고, 그곳에서 나는 외교관으로서의 첫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풋내기 사무관이었던 내게 주어진 첫 임무는 주일본대사관에서 보내온 언론 동향 중 개도국 관련 소식을 번역하여 정리하는 일이었다. 일본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했던 덕분에 맡을 수 있었던 일이었다. A4 용지 한 장에 정갈하게 정리한 보고서에 ‘공람’ 도장을 찍어 상급자에게 전달하며 느꼈던 그 작은 성취감과, 내가 비로소 대한민국 외교라는 거대한 기계 속에서 작은 톱니바퀴로 움직이고 있다는, 소박하지만 단단한 자부심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뿌듯하다.
점차 업무에 익숙해지며 나는 ODA라는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대외원조 규모는 5천만 달러 수준에 불과했고, ODA라는 용어조차 생소해 ‘개발원조’라 부르던 척박한 시절이었다. 국내에 ODA 관련 정보나 자료가 드물어서 업무를 하면서 관련 지식에 목말랐던 나는 어느 날 교보문고 일본 서적 코너를 뒤지다 스미 가즈오의 『일본 ODA 원조의 현실』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일본 원조 정책의 이면을 날카롭게 비판한 그 책을 탐독하면서 나는 원조가 단순한 시혜를 넘어 고도의 외교적 전략이고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틈틈이 그 책을 번역해 경제협력2과 근무를 마치고 해외 연수를 나가기 전, 과에 업무 참고를 위해 남겨두었던 일은 우리 외교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자 했던 젊은 사무관의 작은 출사표와도 같았다.
ODA에 대한 갈증은 이후 미국 연수 시절로 이어졌다. 뉴욕주립대 버펄로에서 연수를 하면서 미·일 외교정책의 수단으로써의 대외원조를 연구했고, “미국과 일본의 대외원조 정책에 관한 비교연구(Comparative Study on the Foreign Aid Policy of the United States and Japan)”을 졸업논문으로 썼다. 귀국 후에는 이 내용을 한국 ODA 정책에 대한 시사점으로 발전시켜 다니고 있었던 행정대학원(야간)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하기도 했다. 헝가리, 모로코, 방글라데시, 아세안 등 다양한 공관 근무에서 ODA는 늘 중요한 도구였고, 경제협력2과에서의 경험은 현장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 헝가리 근무 시에는 겸임국이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크로아티아를 오가면서 다양한 ODA 사업을 현장에서 이행해 나갔고, 모로코에서는 KOICA 해외봉사단을 처음 접수하여 직접 훈련시키고 지휘, 감독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유엔과 제네바에서는 국제기구를 통한 다자 ODA 프로그램에 관여하면서 글로벌 무대에서 우리 ODA의 위치와 역할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방글라데시와 아세안에서는 대사로서 ODA의 효율성과 효과성을 높이기 위한 메커니즘을 만들고 우리 원조의 가시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우리 외교의 전선에서, 특히 개도국에서 ODA는 그야말로 실탄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다양한 ODA 사업들이 현지 국민들과 기관, 정부에 다가가는 중요한 계기와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부에서, 재외공관에서 지난 30여 년간 우리 ODA를 직접, 간접으로 다양하게 다루면서 가져온 애착만큼이나 아쉬움도 크다. 내가 처음 ODA를 맡았던 1991년, 57백만 달러에 불과했던 한국의 ODA 규모는 2024년 약 40억 달러로 90배 가까이 확대되었다. KOICA 등을 통한 무상원조 예산만 해도 1991년 25백만 달러에서 2024년 22억 달러로 100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러나 우리 ODA 규모의 비약적인 확대가 그만큼의 외교적 효과로 이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주된 이유는 분절화다. 많은 사업이 외교부나 재외공관과 연결되지 않고 개별 부처 또는 지자체가 독자적으로 운영하면서 외교적 시너지를 약화시키고 있다. 풍성해진 ODA 자금을 활용하려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우리 ODA 생태계의 후진적 관행도 전략적인 ODA 운용을 가로막고 있는 요소이다.
돌아보면, 작은 보고서 한 장에서 시작된 ODA 업무는 내 외교 인생의 출발점이자 지속적인 관심사였고 내 외교 여정에서 열정의 동력이었다. 첫 부서에서 만난 ODA는 단순한 업무를 넘어서 한 세대만에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우뚝 선 한국이 받은 도움을 되돌려주는 '보은의 기록'이었다. 우리 외교가 변방을 넘어 중심으로 나아가는 전략적 행보였다. 그 과정에서, 특히 내 외교관 여정의 첫 시작에서 맞이한 ODA 업무는 지나온 34년의 길을 깊은 애정으로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