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부서 '과학자원과'에서 보낸 3년
변방(periphery)에서 보낸 시간, 지평을 넓히다
2년간의 해외연수를 마치고 1995년 6월, 설레는 마음으로 외교부에 복귀했다. 국제기구 관련 업무를 희망했지만 기회는 닿지 않았고, 발령 부서는 뜻밖에도 연수 전 근무했던 국제경제국의 '과학자원과'였다. 과학기술, 원자력, 수산, 자원 외교를 담당하던 그곳은 소위 말하는 '주류 부서'가 아니었다. 당시 외교부는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 입주해 있었는데, 공간 부족으로 과학자원과만 근처 '목산빌딩'에 따로 사무실을 임차해 나가 있었다. 서류 결재를 위해 본관을 오갈 때마다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묘한 소외감이 가슴 한구석에 차오르곤 했다. 나는 1998년 헝가리로 부임하기 전까지 3년 가까이 이곳에서 근무했다. 외교부 직원들의 통상적인 한 부서 근무 기간이 1~2년임을 고려하면 꽤 긴 시간이었다. 그 사이 세 명의 과장과 네 명의 국장을 모셨으니, 결코 짧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변방이라 생각했던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훗날 전개되는 나의 외교관 인생을 지탱하는 견고한 뿌리가 되었다.
수산과 과학기술외교의 경험
근무 기간이 길었던 만큼이나 담당했던 업무의 스펙트럼도 넓었다. 수산업무는 내 첫 임무였다. 1995년 6월 북경에서 개최된 APEC 수산실무그룹회의를 시작으로, 한-러 수산위원회, 중국 어선의 서해 불법조업 문제, FAO 수산위원회, 유엔공해어업협정 협상 등 다양한 수산 외교 현안에 참여했다. 주무부처인 수산청을 지원하는 역할이 컸지만 외교부를 대표하는 실무자로 수산청 담당자들과 함께 국제 협상 현장에서 뛰면서 외교의 실제를 체감할 수 있었다. 업무에 익숙해지면서 과학기술 분야도 담당했다. 한-미 과학기술협력공동위원회를 비롯한 주요국과의 과학기술공동위원회뿐만 아니라, 러시아 국제과학기술센터(ISTC) 가입 문제, OECD 과학기술정책위원회(CSTP)와 같은 다자 과학기술협력에도 관여하면서 과학기술외교의 중요성을 맛보았다.
원자력 업무와 아시아원자력안전협의체(ANSCO) 주도의 기회
원자력은 내 열정을 가장 강하게 자극한 분야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12기의 원전을 운영하며 미국, 일본, 러시아, 영국, 프랑스, 캐나다, 호주 등 7개국과 매년 원자력공동위원회를 개최했다. 원전과 핵연료 관련 기술 개발을 위한 협력뿐만 아니라 원활한 핵연료 도입 차원에서도 이들 국가와의 협력은 매우 중요했다. 핵비확산 문제는 군축비확산과의 몫이었지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은 과학자원과가 맡았다. 원자력공동위원회에 외교부를 대표하여 참석하면서 미국, 캐나다, 호주를 비롯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주요 원자력 국가들을 방문하였고, 계기에 영국의 핵연료 재처리시설이나 핵폐기물처분장과 캐나다의 중수로와 같은 주요 핵시설을 시찰할 기회도 있었다. 호주와의 원자력공동위원회에는 세 차례나 참석하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97년 10월 아시아원자력안전회의의 서울 개최 준비 담당자로서 이 회의에서 우리나라가 제안한 아시아원자력안전협의체(ANSCO) 구상을 마련했던 것이다. 1990년 초 첫 상업원전 운영을 시작한 중국은 우리 서해와 인접한 연안에 야심 찬 원전건설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는데, 원자력 안전 분야에서 협력을 통해 역내 협력체에 시동을 걸고 우리의 안전도 담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결실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외교관으로서 발을 내디딘 이후 처음으로 의미 있는 외교적 이슈의 중심에서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계기였다.
외교는 외교관의 전유물인가? 조연이 발견한 주연들
과학자원과의 업무는 외교부가 주도하기보다 과학기술처, 수산청, 상공자원부 등 관계 부처를 지원하는 '조연'의 역할이 많았다. 회의의 수석대표 역시 해당 부처의 국장들이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외교가 외교부만의 일이 아니라, 관계부처의 전문성 속에서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긴밀하게 교류하고 함께 현장에서 발로 뛰면서 만난 타 부처 공무원들과 전문가들은 내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전문성 없는 외교관이 화려한 수사 뒤에 숨어 있을 때, 외교전선에서 승리를 위한 날카로운 무기를 갈고닦고 있었던 실력 있는 전문가들과 마주했던 것이다. 특히 과학기술처 조청원 국장과 함께한 원자력 공동위원회는 큰 울림을 주었다. 웬만한 외교관보다 더 뛰어난 외교적 감각과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회의를 주도하는 그분의 모습 앞에서 외교부 선배들이 작게 느껴질 정도였고, 젊은 나에게는 큰 자극과 배움이 되었다. 외교는 결코 직업 외교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분야별 전문성이 외교적 세련미와 결합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종합예술’ 임을 깨닫는 계기였던 것이다.
수석대표의 무게 : 주도권 경쟁과 뼈아픈 교훈
한 번은 직속 상사인 주철기 국제경제국장님으로부터 특명이 내려졌다. 상대국 수석대표가 외교부 인사인 경우, 우리 측 수석대표도 외교부가 맡도록 관계 부처와 협의해 오라는 것이었다. 오랜 관행을 깨는 일이라 쉽지 않았지만, 끈질긴 협의 끝에 미국과의 원자력공동위원회를 제외한 일본, 호주, 캐나다와의 원자력공동위원회와 미국과의 과학기술공동위원회 수석대표를 외교부가 맡고 과기처는 교체수석대표를 맡는 것으로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1996년 6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6차 한-호주원자력정책협의회부터 처음으로 외교부 국제경제국장이 수석대표로 회의를 주재했다. 그러나 국장이 교체된 이후 1998년 1월, 제3차 한-미과학기술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새로 부임한 국장이 회의 바로 이틀 전 전문성 부족과 준비 시간 부족을 이유로 수석대표 역할을 고사한 것이다. 회의 전체를 진행하는 것도 아니고 개회와 일부 의제, 폐회식에서만 진행하면 되고, 의장용 영문 진행자료도 완료되어 있었는데, 어렵게 쟁취한 기회를 허무하게 반납해야 했던 것이다. 그 순간 실무자로서 느낀 허탈함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는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외교관이 '책임성'까지 결여되었을 때 조직의 위상이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장면으로 남았다.
지평의 확장: '전문성'이라는 든든한 뿌리
과학자원과에서의 3년은 이후 내 외교관 인생에 중요한 의미를 가져다준 시간이었다. 외교는 직업 외교관들만의 영역이 아니라, 다양한 부처와 전문가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의 작업임을 알게 되었다. 이때 쌓은 원자력 지식과 네트워크는 훗날 군축비확산과장(2007년)을 거쳐 주비엔나대표부 IAEA 업무(2009년), 그리고 주제네바대표부 군축위원회(CD) 업무(2018년)를 수행할 때 큰 자산이 되었다. 남들이 기피하던 변방(periphery)에서의 시간이, 사실은 가장 핵심적인 외교관의 근육을 키워준 훈련소였던 셈이다. 돌이켜보면 목산빌딩과 본관 사이를 바쁘게 오가던 그 길은 단순한 출퇴근길이 아니라, 내 외교 인생의 지평을 넓히는 길이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정통 외교관'이라는 좁은 틀을 깨고 나와 외교에 대한 시각과 지평을 넓히는 소중한 기회를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